1974년 3월9일 젊은 기자 33명을 발기인으로 결성된 동아일보 노조는 하루 만에 103명의 조합원이 가입해 언론자유 수호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사진은 3월8일 서울시에 ‘전국출판노조 동아일보사 지부’로 등록 신청서를 제출했다는 사실을 조합원들에게 알린 노조의 공고문.
사진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제공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42)
박정희 정권이 ‘유신독재체제’를 구축하던 1972년 가을을 전후해 동아일보사의 젊은 기자·아나운서·프로듀서들은 3가지 충격을 받았다.
그 하나는 학생운동 세력이었다.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71년 3월24일과 25일 서울대 문리대와 법대 학생들은 학생 총회를 열고, ‘언론 화형식’을 거행하며 ‘언론인들에게 보내는 경고장’을 발표했다. “정치문제는 폭력이 무서워 못 쓰고, 사회문제는 돈 먹었으니 눈감아주고, 문화 기사는 판매부수 때문에 저질로 치닫는다면, 더 이상 무엇을 쓰겠다는 것인가? (…) 어딘가에 있으리라 믿는 (용기 있는 언론인들은) 과감히 편집권 독립투쟁에 나서라.”
이를 부끄러워한 각 신문사의 젊은 기자들은 71년 4월 1차 ‘언론자유수호운동’을 전개했다. <동아일보>에서 고 심재택 기자의 주도로 가장 먼저 선언이 터져나왔다.
또 다른 충격은 박정희 정권이 제공했다. 박 정권은 비상계엄을 발동할 때 늘 신문·방송에 대한 사전검열을 했다. 유신체제 구축을 위한 72년 10월의 계엄 때는 일부 정부 부처와 국회 기자실, 경찰 기자실을 폐쇄했다. 정치부와 경찰 기자들이 할 일이 없게 되자, 회사는 이들을 서울시청에 차려진 검열단에서 ‘사전 게라’(원고를 활자화한 대장)의 검열을 받게 하는 심부름을 시켰다. 늘 목소리 큰 사람들과 맞상대한다는 자부심으로 사는 기자들에게 언론의 ‘언’ 자도 모르는 군인 검열관을 찾아가 대장을 검열받고, ‘삭제 지시’를 받은 대장을 받아오게 하다니! 그때의 참담했던 기자들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라! 검열 심부름은 기자(리포터)를 하루아침에 배달꾼(포터)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동아일보사는 처음에는 삭제 명령 부분은 활자판을 거꾸로 엎어, 벽돌을 나열한 것처럼 지운 신문을 발행했다. 그런데 박 정권이 ‘벽돌신문’은 안 된다고 재지시하자 삭제 기사 대신 독재정권 홍보기사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세번째 충격은 동아일보사 경영진과 고위 간부들로부터 왔다. 사주와 회사가 유신독재의 압력에 당당히 버티지 못하자 73년 3월 동아일보 기자들은 ‘연판장 사건’을 일으켰다. 안성열·조학래·우승용·이종대 등이 중심이 된 연판장 서명은 순식간에 100여명에 이르렀다. 기자들은 “독자적인 편집권 행사와 신문 지면의 쇄신”, “합리적 인사 이동”, “근무 연한에 맞는 봉급 조정과 처우 개선” 등을 요구했다.(<자유언론-1975~2005 동아투위 30년 발자취>,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편)
기자들의 언론자유 운동에도 불구하고 동아일보 지면에서 진짜 뉴스는 점점 사라져갔다. 최초의 ‘유신 반대’ 집회인 73년 ‘10·2 서울대 문리대 시위’를 비롯해 여러 대학의 데모는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서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동아일보사 젊은 기자들은 11월5일 경북대생 시위와 ‘민주수호국민협의회’의 시국선언 묵살을 계기로, 마침내 “중요한 기사가 누락되었을 때는 그 경위를 알아보고 철야하면서 대책을 협의한다”, “선후배 동료가 부당하게 연행되었을 때는 그가 돌아올 때까지 편집국에서 기다리기로 한다”고 결의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철야농성은 11월7일·17일·20일에도 했는데, 11월20일 농성 때는 ‘언론자유수호 제2선언문’을 발표했으며, 12월3일에는 편집국에서 기자총회를 열어 ‘언론자유수호 제3선언문’을 채택했다. 회사는 “사내 철야 등 집단행동을 금지한다”는 방을 붙였다.
74년 초 긴급조치 1·2호가 발동되면서부터는 신문·잡지·방송 등 모든 언론이 더욱 초라해졌다. 청와대·중앙정보부·국군보안사 등 독재권력의 핵심부는 물론이고 국방부·검찰·경찰·국세청·정부부처·재벌 등도 담당관을 두고, 이른바 ‘기사 협조’를 다투어 요청했다. 필요할 때는 언제라도 해당 언론사에 전화로, 큰 사안일 때는 직접 사장·주필·편집국장·담당부장을 방문해 청탁과 압력을 넣었다. 그리고 그들의 압력과 청탁은 대체로 지면에 공공연하게 반영되었다.
급기야 74년 3월1일 동아일보사는 동아방송 기자 2명을 프로듀서로, 다른 1명은 영업부 사원으로 보직을 변경하는 ‘폭거’를 저질렀다. 특히 박 정권에 의해 ‘허위사실 유포죄’로 구속되었다가 집행유예로 석방된 고준환 기자를 피디로 보직 변경한 것은, “정권에 밉보인 기자는 회사를 떠나라”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마침내 기자들은 유신정권으로부터 집단적으로 신분을 보장받으려면 노조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74년 3월6일 젊은 기자 33명은 고 김두식(당시 방송뉴스부 근무) 기자의 집에서 동아일보 노조를 결성했다. 3월7일 하루 동안 70명의 가입 신청서를 더 받아, 3월8일 서울시에 103명의 조합원을 가진 ‘전국출판노조 동아일보사 지부’(지부장 조학래 과학부 기자)로 등록 신청서를 제출했다. 68년 ‘신동아 필화사건’ 때 언론인 최석채(당시 <조선일보> 주필)는 이미 침몰하고 있는 언론자유에 대한 대응책으로 ‘언론노조의 결성’과 ‘사원들의 언론사 주식 공유운동’을 제안했었다. 그 뒤 6년 만에 동아일보사의 젊은 언론인들이 진짜로 노조를 만든 것이었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도움 강태영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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