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 성벽에서 올려다본 숙정문 전경과 부근 성곽의 모습.
풍수설에 뚫었다 닫혀 600여년만에 빛보는 ‘비운의 성문’
“자연유산이 옛 문화유산과 이렇게 잘 어우러진 경우도 흔치 않은데…. 저 성벽 길 옆에 구부러진 조선 소나무 군락 좀 보세요. 다른 데서는 보기 어려운 비경입니다.” 옛 한양성 북문인 북악산 자락의 숙정문과 부근 성곽을 전문가들에게 공개한 지난 8일, 생태학자 이인규(문화재위원)씨는 답사 내내 흥분에 들떠 있었다. 문화재청이 내년 4월 개방안을 발표한 홍련사-숙정문-촛대바위의 1.1km구간은 성벽 주위가 온통 토종 소나무 숲으로 둘러쌓이고, 서울 사대문 안 전경도 눈에 착 감기는 최고의 전망대였다. 둘러본 다른 전문가들도 이구동성으로 “세계 문화유산 감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견해를 내비쳤다. 조선 태조 4년인 1395년 신도시 한양성을 닦을 때 사대문의 하나로 세워졌으나 곧 문을 닫은 채 잊혀졌던 숙정문은 600여년만에 문화유산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은 셈이다. 휴전선 같은 이중 철책을 두른 채 경비병들의 수색 작전이 부근에서 날마다 진행되는 살벌한 분위기의 이 역사유적이 뒤늦게 재평가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 비운의 성문에 덧씌워진 이념과 사상의 굴레와도 무관치 않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숙정문은 태조가 신도시 한양성을 축조할 때부터 천덕꾸러기의 운명을 타고 났던 것으로 보인다. 태조의 명을 받은 공신 정도전은 풍수설에 따라 성터를 닦고 숭례문(남대문), 흥인지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 홍지문(이후 곧 숙청문, 숙정문으로 개칭)등의 사대문과 사소문을 세우면서 팔방에 문을 뚫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산자락 중턱에 들어선 숙정문은 교통 소통의 기능을 인근의 동소문, 무악재 등에 넘겨준 채 무용지물 신세가 된다. 태종 13년인 1413년 6월에는 풍수학자 최양선의 이런 상소까지 올라왔다. “풍수로 보아 숙청문(숙정문의 전 이름)과 창의문(서북쪽 소문)은 경복궁을 둘러싼 양팔 격이니 통행하는 것은 지맥을 손상시키는 것입니다. 문을 닫고 통행을 금해야 합니다.” 결국 숙정문은 이후 곧장 폐쇄되어 조선시대 내내 침묵하는 운명을 맞는다. 연산군 10년(1504년)에는 문의 위치가 폭군의 마음에 들지않았던지 원 위치보다 약간 동쪽으로 옮겼으며 아치형 문이 있는 석문만 남겼다고 전해진다. 숙정문을 남대문 동대문 등과 달리 북대문으로 부르지 않는 까닭도 여기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관문에 걸맞는 풍채와 권위를 지니지 못했던 것이다.(현재 문은 76년 태조 때 문루를 지었다는 추정을 근거로 복원했다.) 숙정문에 덧씌워진 풍수지리학적 너울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의 경사편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숙정문은 양주()의 북한산으로 통하는데, 닫혀있다. 어느 때 폐쇄되었는지 모르겠으나 개통하던 당시, 한양성의 남녀 사이에 음란한 풍조가 자꾸 일어나므로 닫아버렸다고 한다.” 음양오행의 측면에서 도성에 북쪽의 음기가 직접 들어오는 통로인 숙정문을 막아야 풍기문란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게 선비네들의 믿음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속설은 <송남잡기> <경도잡지> 등 문집에도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숙정문이 용도 폐기된 것만은 아니었다. 풍속사 문헌들을 보면 숙정문의 음기는 물과 연관되므로 가물거나 큰 물이 졌을 때 애용(?)되는 살풀이 퍼포먼스의 무대였다. 태종 16년에 날씨에 따른 예절을 정한 <기후절목>을 보면 가물 때 종묘 사직, 명산·대천에 기우제를 지내되 효험이 없을 경우 최후 수단(?)으로 숙정문을 열고 양기를 상징하는 남대문을 닫게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 인적이 드물고 경치가 수려한 숙정문 부군은 특유의 풍수적 의미 덕분에 양가집 규수나 아낙들이 놀이장소 1순위로 꼽는 곳이었으니 남정네들을 밀회하는 장소로 쓰였던 것도 사실이다. 정월 대보름 때 민간 부녀자들이 세 번 숙정문에 가서 놀면 그 해 재액을 면한다는 <동국세시기>의 기록이나 ‘제 아무리 못난 사내놈도 북문에 가면 호강한다’는 옛 속담은 이를 반증하는 것들이다. 숙정문은 68년 1월 북한군 특수부대의 청와대 습격 시도사건 뒤 군 철조망에 갇혀 분단의 생채기까지 입는다. 하지만 최근 시민단체 등의 개방 주장이 받아들여져 일급 휴식처로 새로 나게 되었고, 세계 유산 등재 후보로도 거론되고 있으니 새옹지마의 고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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