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명량>과 <광해> 등에 참여한 권유진 의상 감독이 11일 오후 서울 한남동 작업실에서 <광해>에 쓰인 곤룡포를 예로 사극 의상의 고증과 제작 과정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천만 관객을 기록한 <광해>는 권 감독이 한국의 첫 영화 의상 디자이너인 어머니 이해윤 선생에게 처음으로 칭찬을 들은 작품이기도 하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영화 ‘명량’ 의상감독 권유진
‘영화의상 대모’ 이해윤 아들
‘길소뜸’ 데뷔 후 150편 참여
광화문 갑옷, 100년 뒤 입었을 옷
출토 갑옷 바탕으로 재창조
영화 위해 의상 1000벌 만들어
촬영 현장서 하루 40~50벌 수선
‘영화의상 대모’ 이해윤 아들
‘길소뜸’ 데뷔 후 150편 참여
광화문 갑옷, 100년 뒤 입었을 옷
출토 갑옷 바탕으로 재창조
영화 위해 의상 1000벌 만들어
촬영 현장서 하루 40~50벌 수선
“드르륵, 드르륵~.”
지난 11일 오후 찾아간 서울 한남동 해인엔터테인먼트 작업실에선 연신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옷걸이마다 각양각색의 옷이 걸려 있었고, 여기저기 형형색색의 옷감이 쌓여 있었다. 벽에는 <서편제> <장군의 아들> <태백산맥> 등 영화 포스터가 빼곡히 붙어 있었다. 긴 머리를 뒤로 묶고 모자를 눌러쓴 권유진(55) 의상감독이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최근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 <명량>의 의상을 디자인한 그다.
“<명량>이 1000만 관객을 넘길 거라 예상은 했지만, 속도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평소 영화를 잘 안 보는 친구들도 나한테 ‘표 없냐’고 물어올 정도라니까요. 영화가 잘되니 저도 기분이 참 좋습니다.”
권 감독은 이번 영화를 위해 무려 1000벌의 의상을 만들었다. 당시 복식을 고증하는 게 관건이었다. “광화문 이순신 동상의 갑옷은 임진왜란 이후 100년 뒤에나 나온 미늘 갑옷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입었을 리 없어요.” 그가 참고로 삼은 것은 이순신 장군을 천거한 서애 유성룡의 찰갑 갑옷이다. 실제 출토된 찰갑을 바탕 삼아 상상력을 더했다. 어깨에 은으로 만든 견룡을 달고, 가슴에 용 문양을 새겨 넣었다.
개봉 전에 영화 장면 사진이 공개되자 일부 갑옷 마니아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전자우편을 보냈다고 한다. 실제와 다르다는 것이다. 이에 권 감독은 ‘고증대로 똑같이 만든다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내야 한다. 영화 의상은 고증을 토대로 하면서도 상상력을 더해 아름답게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답장을 보냈다. “이런 문제 제기도 약이 됩니다. 정신 바짝 차리게 만들거든요.”
왜군 장수의 갑옷은 일본에서 3대에 걸쳐 갑옷을 만들어온 장인을 수소문해 제작했다. 폴리에틸렌(PE)으로 만들어 비교적 가벼운 조선 수군 갑옷과 달리 왜장의 갑옷은 철로 만들어 무게가 20㎏을 훌쩍 넘는단다. 왜장 도도(김명곤)와 와키자카(조진웅)에 대한 자료는 충분했지만, 구루지마(류승룡)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아 상상력을 발휘해야 했다. 권 감독은 일본에서 ‘전쟁의 신’이라 불리는 다케다 신겐의 투구를 모티브 삼아 구루지마의 투구를 디자인했다.
“호전적인 구루지마가 다케다 신겐을 존경하는 의미로 그의 투구를 본뜬 투구를 만들어 썼을 거라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어요. 대신 다케다 신겐 투구의 하얀 털을 검은 털로 바꿨죠.” 구루지마의 강렬한 인상을 만든 투구는 이런 과정을 거쳐 완성됐다.
이토록 공들여 만든 갑옷들이 영화 속 백병전 촬영 현장에서 깨지고 부서지기 일쑤였다. 현장에 수선소를 차리고 하루 40~50벌을 깁고 때워야 했다. “그렇다고 갑옷을 너무 튼튼하게 만들면 배우들이 움직이기 힘들고 다칠 수도 있기 때문에 약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그는 설명했다.
권 감독은 대를 이어 영화의상 일을 하고 있다. ‘한국 영화의상의 어머니’로 불리는 이해윤 선생이 그의 어머니다. 사진을 좋아했던 아버지는 그가 종군기자가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2차 세계대전 종군기자로 활약한 유진 스미스의 이름을 따서 그의 이름을 지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재봉틀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논 그는 결국 어머니의 뒤를 이었다.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1985)으로 데뷔한 이래 150여편의 영화에 참여했다. 각종 영화제에서 여러차례 의상상을 수상했다.
“올해 구순을 맞은 어머니는 무척 엄한 스승이셨어요. 어머니에게서 처음 칭찬을 들은 게 <광해, 왕이 된 남자>였죠. ‘의상이 예쁘구나. 잘했다’ 하시더라고요. 어머니께서 <명량>은 아직 못보셨는데, 보시고 나면 혼낼 것 같은데요? ‘갑옷을 왜 이렇게 시커멓게 만들었냐’고 하시면서요. 하하~.”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영화 ‘명량’
영화 <명량>과 <광해> 등에 참여한 권유진 의상 감독이 11일 오후 서울 한남동 작업실에서 <명량> 중 왜장 구루지마의 면갑(얼굴을 가리는 마스크) 제작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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