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소라 시인이 3일 오후 전북 전주시 자택에서 새로 발굴된 석정의 미발표 시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왼쪽) 파손된 누군가의 시집 여백에 쓴 신석정의 시 <젊은 군상>.(오른쪽)
신석정 미발표 시 13편 발굴
신석정의 미발표 시가 무더기로 확인된 것은 작자 미상의 파손된 시집 여백에서였다. 표지와 본문 상당수가 뜯겨 나간 이 시집 본문 18쪽부터 62쪽 사이 하단 여백에 석정이 손수 쓴 시 27편이 적혀 있는데, 이 가운데 14편은 석정이 직접 발표했거나 석정 사후에 제자인 허소라 시인이 공개한 작품들이고 나머지 13편은 그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이다. 그중 상당수 시에 ‘인민’ ‘해방’ ‘원수’ ‘봉화’ 같은 낱말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신석정은 혼란스러운 해방 공간에서 이 작품들을 발표할 경우 적잖은 파장을 일으키고 스스로도 곤경을 겪을 것을 우려했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저는 석정 선생님이 이 작품들을 ‘암장’(暗葬)하신 거라고 봅니다. 표지도 없이 심하게 파손된 시집 여백에 낙서처럼 작품을 써 놓으신 건 혹시 가택 수색이라도 당할 경우 들키지 않기 위한 선생님 나름의 고육책이었던 것이죠.”
허소라 시인이 이 원고를 발견한 것은 1974년 7월 석정의 장례식이 끝난 뒤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였다. 허 시인은 석정이 작고하기 직전 김기림의 서명이 담긴 시집 <기상도>와 <태양의 풍속> 등 귀중한 자료들을 넘겨줄 정도로 아끼고 신뢰했던 제자. 그는 유족들과 함께 스승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이 시집 여백에서 선생의 글씨체를 발견하고는 따로 챙겨 두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여백에 쓰인 것들은 다름 아니라 미발표작들을 포함하는 석정의 시들이었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1970년대나 그 뒤 1980년대까지는 공개하는 것이 조심스러워서 아껴두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언론 자유도 어느 정도 신장되고 해서 지금쯤은 공개해도 괜찮겠다고 판단했다”고 허 시인은 밝혔다.
해방 이듬해 1946년작엔
‘새로운 나라’에 대한 희망 담고
분단 위기 놓인 1948년작엔
‘봄이 떠나간다’며 안타까움 노래
기존 ‘목가시인’ 평가 뒤집는
시인의 고뇌와 역사 인식 선연
1946년 투옥 사실도 처음 밝혀져
40년만에 공개한 제자 허소라 시인
“시대상황 탓에 ‘암장’ 됐던 시…
이젠 공개해도 괜찮겠다 판단”
“연약한 너의 아버지 이 감방에서/ 산송장으로 하고 있을지라도/ 인민의 나라 세우는 날 새나라 세우는 날/ 이 작은 피는 온몸으로 흘리리라/ 비처럼 사뭇 줄줄 흘리리라(1946년 5월6일)”(<피-에레나에게 주는 시> 뒷부분)
“‘영’이도/ ‘영’이의 동무도/ 젊은 놈이라고 생긴 젊은 놈은/ 모두 숨어버리고// (…) // 오늘밤에도 그 젊은 놈들은/ 어느 산마루에 봉화를/ 올리는 것일까?// 우루루/ 우루루루/ 아득하니 들려오는 우뢰ㅅ소리를/ 마을에서는 돌아오지 않는 ‘영’/ 이놈들의 고함소리로만/ 들었다.(1948. 9. 1.)”(<원뢰(遠雷)> 부분)
“건넌마을 ‘영’이네 아버지가 떠나자/ ‘순이’의 오빠가 뒤이여 자쵤 감추고/ 동네 젊은 사람들은 시나브로/ 뉘 원수를 갚아야 하기에/ 지리산으로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것일까.(1949. 1. 8. 밤)”(<지리산> 부분)
인용한 시 <피>와 ‘감방에서 어린이날을 맞이하며’라는 문구가 덧붙여진 <오월이 올 때마다>(1946년 5월5일 탈고)는 석정이 감옥에서 쓴 것으로 추정된다. 1946년에 석정이 감옥에 있었다는 사실은 아직껏 알려진 바 없어서 이 시들은 시인의 전기적 자료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원뢰>와 <지리산>은 문맥상 6·25 전쟁 전에 지리산 등으로 들어갔던 ‘구빨치산’을 소재로 삼은 것으로 읽힌다. 신동엽의 <진달래 산천>을 떠오르게 하는 이 작품들에서 시인의 태도가 그들의 ‘고함’과 ‘원수 갚음’에 우호적임을 알 수 있다.
“북극성이 똑바로 바라뵈이는” “준령”을 넘어 “촉나라로 가는” 두 청년을 통해 ‘월북’ 행로를 그린 듯한 <노숙>(탈고 시점 불명확)이라든가 “남녘 하늘엔 해도 없는가/ 밤에는 별도 별도 우는데/ ‘설마 오는 봄에사’ 하고 이르는 새에/ 이 봄도 가나베 떠나가나베”라며 해방의 감격이 또 다른 질곡으로 이어지려는 현실에 대한 우려를 담은 <이 봄도 가나베 떠나가나베>(1948년 4월27일) 같은 작품에서도 시인의 고뇌와 준열한 역사 인식은 선연하다.
허소라 시인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같은 초기 시를 근거로 석정 선생님을 ‘목가시인’의 범주에 가두어 두는 비평적 태도가 온당하지 않음을 이번 미발표 시들을 통해 새삼 확인할 수 있다”며 “당신의 미발표작들이 <한겨레>를 통해 빛을 보게 된 데 대해 선생님도 흐뭇해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전주/글·사진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새로운 나라’에 대한 희망 담고
분단 위기 놓인 1948년작엔
‘봄이 떠나간다’며 안타까움 노래
기존 ‘목가시인’ 평가 뒤집는
시인의 고뇌와 역사 인식 선연
1946년 투옥 사실도 처음 밝혀져
40년만에 공개한 제자 허소라 시인
“시대상황 탓에 ‘암장’ 됐던 시…
이젠 공개해도 괜찮겠다 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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