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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일곱차례 평양 오가며 ‘통일 디딤돌 놓기’ 열정

등록 2014-10-19 21:41수정 2014-10-19 23:46

고 김용태 선생은 생전에 북한을 일곱차례 방문하며 남북 문화교류 활동에 매진했다. 사진은 두번째 평양 방문인 2000년 10월10일 노동당 창건 55돌 기념행사 참관 때로, 왼쪽부터 당시 조성우 민화협 남쪽 대표, 김용태 민예총 이사장, 김영성 민화협 북쪽 준비위 부위원장, 박인배 민예총 기획실장.
고 김용태 선생은 생전에 북한을 일곱차례 방문하며 남북 문화교류 활동에 매진했다. 사진은 두번째 평양 방문인 2000년 10월10일 노동당 창건 55돌 기념행사 참관 때로, 왼쪽부터 당시 조성우 민화협 남쪽 대표, 김용태 민예총 이사장, 김영성 민화협 북쪽 준비위 부위원장, 박인배 민예총 기획실장.
마지막까지 ‘남북교류’ 구상한 ‘용태 형’
1993년 일본서 첫 남·북·동포 미술전
“과시적 효과 없어도 문화예술인 나서야”
고 김용태 선생은 1993년 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의 사단법인화를 계기로 예술을 통해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는 통일운동에 기여하고자 남북 문화교류 활동에 적극 나섰다. 그해 10월 도쿄와 오사카에서 열린 <코리아통일미술전>은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한 예술인들이 제3국에서나마 함께한 자리로 문화교류의 물꼬를 텄다. 특히 2000년 김대중-김정일 정상회담 이후 일곱차례나 북한을 방문했던 그는 지난 5월 마지막 순간까지도 중단된 남북 교류를 다시 잇는 구상을 추진하고 있었다.

“와이에스(김영삼) 정부 초기에 교육문화수석으로 기용된 김정남, 그 형이 적극적으로 나서 준 덕분이었어. 한완상 통일 부총리, 김도현 문화부 차관 등도 내 뜻을 듣고 적극 지원해줬고.”(<산포도 사랑, 용태 형> 구술 대담 중에서)

94년 여름 분단 이후 첫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남북 예술인들도 베이징에서 여러 차례 만나 다양한 교류사업에 합의를 했다. 하지만 그해 4월 김일성 북한 주석의 돌연한 사망으로 김영삼 대통령의 평양행은 무산됐고 남북 관계는 다시 경색국면으로 바뀌어버렸다. “미술인으로서, 그때 서울과 평양을 오가면서 전시회를 한 번씩 했어야 됐는데 결론적으로 한 번도 못했지. 남쪽과 북쪽 미술단 대표가 악수하는 그런 장면이 있어야 했었는데, 아쉽지요.”

고 김 주석이 그때 직접 남북 교류와 개방정책을 주도했다면 이후 남북 관계가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그의 아쉬움은 마침내 2000년 6월 김대중-김정일 정상회담에 이르러 다시금 희망으로 바뀌었다.

“(김영삼 정부 이후) 어쨌든 간에 문화예술인의 남북 교류가 가장 앞서 나갔어.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 때는 나도 공동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고.”

‘용태 형’은 2000년 9월 ‘남북한 관광 백두·한라 교차 방문단’으로 처음 북한을 방문했다. 그 2주일 뒤인 10월10일에는 북한 노동당 창건 55돌 행사 초청을 받아 두번째 평양을 다녀왔다. “첫 방문 때 백두산에 가서 며칠 동안 있었는데…안타까운 건 민예총 음악분과 위원장으로 동행했던 문호근(문익환 목사의 장남) 예술감독이 다녀온 지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난 거야. 급작스럽게 심장마비로.”

그는 2005년 6월 민족통일 대축전 때 남쪽 대표단과 함께 평양을 방문해 고 문호근의 꿈이었던 민족서사극 <금강>의 봉수대 예술극장 공연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그때 75살 고령의 연극배우 장민호 선생도 출연진으로 참가한 데는 “고향 평양을 꼭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원로 예술인의 소원을 배려한 것이었다. “장민호 선생이 나를 찾아왔어요. 죽기 전에 꼭 한 번 가고 싶다고. 그래서 배역을 하나 만들어 고향을 방문하도록 도와준 거야. 근데 가족들은 못 만났어. 그건 안 되더라고.”

고 김용태 선생은 구술 대담에서 마지막으로 남북 교류 활동의 의미를 평가해달라는 요청에 이렇게 갈무리를 했다.

“한 시대에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는 건 용감한 거야. 또 성과야 어쨌든 간에, 분단을 극복해보려고 하는 노력 그 자체가 얼마나 중요한 건데. 가시적인 효과가 없더라도 해야 하는 거야. 다 그런 거야. 시대가 좀 변했다고 해서 헌신적으로 고생했던 사람들을 잊어서는 안 돼. 다 고생했지. 문익환 목사도 그렇고 김구 선생도 얼마나 훌륭해. 그런 앞서가는 사람들이 항상 있어야 된다고 봐. 어려운 시기에 그런 것을 만들어내는 약간 선도적인 부분을 항상 역사 속에서 그런 게 나와야 된다고. 그래야 조금씩 진일보하고 발전하는 거지. 그걸 지금 목소리 높여 비난한다고 우리가 기죽을 필요는 없다고 봐요. 현 정부에서도 조금만 노력을 하면 될 텐데 안타까운 일이야. 디제이 선생 말마따나 햇빛정책으로 녹여야지. 이걸 정부가 크게 내다봐야 해. 너그럽게 정치적으로 풀고 대화하고 그래야지. 시대상황을 봐서 필요할 때에는 만나고, 아닐 때는 싸우고 그런 거지. 항상 관계를 싸우게 해서는 안 된다고. 통일해서 남북한 실크로드 뚫고 열차 개통하고 민족 번영의 계기를 잘 만들어야 하는데, 그나마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성과 있는 남북 관계를 만들었다고 봐요. 햇빛정책이 얼마나 중요한 정책인가를 모두가 잘 알아야 해. 그게 평화통일로 가는 길이야.”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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