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태형 총련·북 예술인과 접촉 성사
보수 언론서도 “교류 물꼬” 대환영
행사 마지막날 남쪽 서기 안나타나
달리는 전철서 ‘협약 발표문’ 작성
보수 언론서도 “교류 물꼬” 대환영
행사 마지막날 남쪽 서기 안나타나
달리는 전철서 ‘협약 발표문’ 작성
1993년 10월 일본에서 열린 <코리아통일미술전>은 비록 제3국이었지만 분단 이후 남북 미술인의 첫 문화교류라는 역사적 상징성 덕분에 안팎의 주목을 받았다. 그런 만큼 갖가지 화제와 뒷얘기도 풍성했다.
애초 사상 첫 남북 미술전은 92년 7월 도쿄에서 <일본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미술가회의전>(JAALA) 기념행사로 ‘통일을 위한 남북 미술인’이란 제목으로 기획됐다. 하지만 일본 쪽의 제안에 북한이 화답을 하지 않아 무산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자라전’에 갔더니, 재일 조총련의 문학예술가동맹(문예동) 미술위원장인 조선화가 홍영우(인민예술가) 선생이 와서 남북 미술교류를 하자는 제안을 먼저 했어. 자기들이 주선을 하겠노라고. 그래서 좋다고 일차적인 약속을 했고, 그 뒤 나와 박인배가 일본에 가서 문예동 사무국장 김정수 등과 여러번 만나 협상을 했고, 일정이 잡혔고, 북쪽에서도 좋다고 해서 전시를 하게 된 거야. 물론 나는 처음부터 남쪽에서, 서울에서 하자고 고집을 했지만 북쪽에서 곤란하다 하더라구.”
고 김용태 선생은 “문민정부 들어 북한 예술인들을 만나러 다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어. 처음에는 일단은 (국가보안법 등) 무서워해서들…”이라고 그때 분위기를 회고했다.(<산포도 사랑, 용태 형> 중에서)
“도쿄에서 일주일, 오사카로 옮겨 일주일 통일미술전을 했는데, 재일동포들, 특히 조선대 미술학과 학생들이 거의 헌신적으로 도왔어. 또 한가지 극적인 장면은 남북한 대표들이 조선대를 처음으로 함께 방문한 것이었어. 남쪽 기자들에게도 과감하게 문을 열어주고 물론 열렬한 환영을 받았지.”
‘통일미술전’은 당시 국내 보수 언론에서도 ‘남북 민간교류의 물꼬를 텄다’며 이례적으로 대환영을 받기도 했다. 그때 민예총 편집실장으로 도쿄에 동행했던 심광현은 ‘술 때문에 빚어진 실수담’을 <산포도 사랑…>에 자진 고백해 놓았다. “도쿄 일정을 마무리하고 마지막날 남북 대표단이 만나 앞으로 남북 문화교류의 틀이 될 최초의 교류협약서에 서명하기로 했다. 그런데 전날 밤새 술을 마시는 바람에 난 그날 행사에 지각을 하고 말았다. … 일주일 내내 들떠 있던 내 심리를 예측한 형이 미리 금주령을 내렸음에도 … 신학철 선생님, 강요배 형과 함께 몰래 숙소를 빠져나와 길거리에서 날이 샌 줄도 모르고 마셨던 것이다.”
협약식 기자회견 발표문을 작성해주기로 한 남쪽 대표단의 서기가 사라졌으니 용태 형에게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던 모양이다. “도쿄에서 마지막날 아침에 광현이가 사라진 거야. 기자회견 다 끝나고 저녁 뒤풀이 때 나타나더라고. … 할 수 없이 흔들리는 전철 속에서 내가 직접 땀을 뻘뻘 흘리며 메모지에 기자회견 발표문을 썼지. 얼마나 당황했는지 몰라.”
하지만 평소에도 곧잘 이견을 내고 반대를 고집했던 그에게 용태 형은 ‘기고만장’이라 놀리곤 했지만 화를 낸 적은 없었단다. 이후 문화연대로 갈라지면서 개인적 친분을 쌓지 못했다는 심광현은 “언제부터인가 나도 모르게 용태 형의 정신으로 일을 꾸려나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스스로 놀라곤 한다”고 털어놓았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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