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뉴욕에서 우연히 만나 한국의 민중문화예술을 국외에 소개하기로 의기투합한 황석영과 김용태는 87년 3월 뉴욕과 도쿄 등에서 ‘민중미술 전시회’를 성사시켰다. 사진은 당시 뉴욕의 민중목판화 전시장에서 열린 ‘민주헌법쟁취 미동부지역 결성대회’에서 강연하고 있는 김용태 민미협 사무국장. <한겨레> 자료사진
신경림 시인 ‘산포도 사랑’ 서 회고
“발기인 섭외·사무실·직원모집
모두 다 김용태 혼자서 해내”
문학평론가 염무웅의 기억엔
“동료를 위해 자신과 예술 희생
계획·실행력 탁월한 문화기획가”
“발기인 섭외·사무실·직원모집
모두 다 김용태 혼자서 해내”
문학평론가 염무웅의 기억엔
“동료를 위해 자신과 예술 희생
계획·실행력 탁월한 문화기획가”
“1988년 여름으로 기억된다. 느닷없이 김용태 화백으로부터 만났으면 싶다는 전화가 왔다. 찻집으로 나가니, 황석영과 앉아 있었다. 술집으로 옮겨 장황한 얘기 끝에 최근 젊은 문인과 화가들 사이에 진보적 예술단체를 만들자는 움직임이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나를 보자고 한 용건은 바로 진보적 문예단체 만드는 일을 상의하자는 것이었다. 사실은 통고였다. 나더러 사무총장을 맡으라는 것이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인 이런 제의를 아무리 줏대없는 나라도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내가 거절하자 김 화백이 사무차장으로 모든 일을 도맡아 할 것이니 이름만 올리면 된다고 유혹하고, 황석영은 대변인을 맡아 바깥일을 전적으로 책임지겠다며 변죽을 울렸다. 더군다나 조직을 만들면서 가장 골치인 자금 문제는 둘이서 책임지겠다는 바람에 나는 대답을 겨우 하루 미루었다가 수락을 하고 말았다.”
민예총 초대 사무총장을 지낸 시인 신경림은 <산포도 사랑, 용태 형>에서 ‘헌신적인 문화운동가의 희생’이란 제목으로 고 김용태 선생과 함께한 인연을 회고했다.
“이듬해 겨울 민예총 창립을 하게 되기까지, 약속한 대로 김용태 화백은 발기인을 섭외하고 돈을 구해 사무실을 얻고 직원을 뽑고…, 모두 다 혼자서 했다. 내가 한 일이 있다면 당시 ‘금성’ 사보팀에서 일하던 황명걸 시인에게 부탁해 텔레비전이며 선풍기며 몇 가지 전자제품을 들여놓은 것뿐이다.”
“민예총 창립에 그가 많은 일을 했다는 말은 충분하지가 않다. 민예총은 전적으로 그의 힘으로 만들어졌고 그의 힘으로 이어져 갈 수 있었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많은 희생을 했다. 우선 그림을 많이 그리지 못했다. 동료들의 작업 환경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데 자신의 예술적 에너지와 시간을 다 낭비했다고 표현해도 지나치치 않을 것이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못 된다. 이웃을 위해서, 자기는 희생을 할 수도 있다는 착한 생각이 그로 하여금 사반세기 동안 민예총을 책임지게 만든 것이다.”
“훗날 그는 사무총장을 거치고, 이사장도 맡았지만 그동안 그가 치른 희생은 비단 자기 예술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물질적 보상이 따르지 않는 예술운동은 숙명적으로 가난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겠으나, 그가 민예총에 쏟는 애정은 거의 병적이었다. 가령 한때 그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상임이사를 하기도 했는데, 이때의 수입도 거의 민예총 일에 쓰고 집안 살림에 보탬을 주지 않았으니, 그의 민예총에 대한 지나친 애정이 그를 결국 가난하게 만든 셈이다.”
1993년 2월 민예총 정기총회에서 강연균 화백과 함께 공동의장을 맡았던 문학평론가 염무웅이 기억하는 ‘김용태’도 크게 다르지 않다.
“93년 합법공간 안으로의 진입, 즉 민예총의 사단법인화를 결정하고 이를 실현시켰다. 영광스럽게도 내가 초대 이사장으로 선출되었는데, 실은 막후에서 모든 것을 책임지고 계획·실행한 것은 김용태였다. (…) 그는 사람 사귀는 데 천재였다.”
하지만 그는 “이 뛰어난 능력가 김용태에게 딱 한가지 약점이 있었다”고 안타까워했다. 바로 “자신의 능력을 현실에 마음껏 옮길 수 있는 힘으로서의 돈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대신 어디선가 후원자를 구하는 재주는 약간 있었던 김용태는 탁월한 문화기획가’라고 결론맺었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