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린지 주지인 하루타 유젠이 이 사찰의 자랑거리인 ‘탄생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9세기 통일신라에서 구리로 만든 불상으로, 나무 받침대 위에 아기 부처가 서 있는 모습이다.
2012년 10월에 이어 지난 24일 또다시 일본 쓰시마 사찰에서 한국인에 의해 불상 도난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이번 사건은 불상을 훔친 한국인들이 쓰시마를 벗어나기도 전에 현지 경찰에 붙잡히면서 마무리됐지만, 이 사건을 바라보는 한·일 두 나라 국민들의 시각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상당수 한국인들은 왜구에게 약탈당한 우리 유물을 되찾아오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반면, 일본인들은 문화재 절도사건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지난 24일 일어난 쓰시마 사찰 바이린지(梅林寺)의 불상 도난 사고를 보는 제 마음도 복잡합니다. 필자가 이번에 도난당했던 불상의 존재 사실을 국내에 알린 사람 가운데 한 명이기 때문입니다.
일본 쓰시마의 사찰인 바이린지의 옛 현판. 1600년대 중반에 제작된 것으로 ‘조선국 패곡’이라는 사람이 썼다고 적혀 있다.
바이린지 유물을 취재해 보도한 것은 2008년 여름이었습니다. 일본 쓰시마에 있는 한반도 유물을 종합적으로 취재했는데, 바이린지는 중요한 취재처였습니다. 바이린지는 일본 최초의 사찰로 알려져 있습니다.
백제 성왕은 552년 노리사치계에 명하여 일본에 불교를 전파했습니다. 노리사치계 일행은 불상과 불경을 갖고 일본으로 가던 도중 쓰시마에 잠시 머물렀는데, 당시 쓰시마에서는 임시 건물을 지어 불상과 불경을 귀하게 모셨습니다. 이후 쓰시마에서는 임시 건물 자리에 새로 건물을 지었는데, 이것이 일본 최초의 사찰입니다. 바이린지라는 이름은 후대에 붙여진 것으로, 처음 사찰을 세웠을 때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노리사치계 일행이 쓰시마에 머물렀던 연대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습니다. 바이린지 쪽은 우리 기록보다 14년 빠른 538년에 노리사치계가 쓰시마를 거쳐 일본에 갔다고 주장합니다.
바이린지는 1400년대 중반부터 1800년대 후반까지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예부터 한반도와 일본을 오가는 선박은 쓰시마에 잠시 머물러 물과 식량을 보충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일본 선박이 조선에 들어오려면 쓰시마 도주가 발급한 통행증을 반드시 갖고 있어야 했습니다. 쓰시마 도주 집안인 소(宗) 가문은 통행증 인장을 바이린지에 보관해두고, 통행증 발행권까지 바이린지에 위임했습니다. 바이린지가 일본 통틀어 가장 유서깊은 사찰인데다, 선박 통행로인 고후나쿠시(小船越) 인근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바이린지의 위세는 대단했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바이린지에 귀중한 유물이 대량 소장돼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본 쓰시마의 사찰인 바이린지가 소장하고 있는 고려시대 몽골 병사 모형 목각인형.
바이린지엔 한반도에서 건너온 유물이 여러 점 있지만 이 가운데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이 이번에 도난당했던 불상입니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에 구리로 만든 겁니다. 나무 받침대 위에 아기 부처가 서 있는데, 불상만의 높이는 10.6㎝, 받침대까지 포함하면 12.2㎝입니다. 갓 태어난 석가모니가 오른손은 하늘을, 왼손은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말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탄생불’이라고 불립니다. 부처의 가슴에는 만(卍)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바이린지 주지인 하루타 유젠(58)은 “고려시대 때 고려에서 일본으로 불상 등 귀한 물건들을 싣고 가던 배가 쓰시마 앞바다에 침몰했다. 당시 쓰시마 주민들이 바다에 가라앉은 물건들을 수습해 일본에 다시 보내려 했는데, 일본 조정에서 ‘석가모니를 모신 선박이 그곳에 가라앉은 것은 석가모니가 쓰시마에 머물겠다는 뜻이다. 석가모니를 쓰시마에서 귀하게 모시도록 하라’고 명했습니다. 그래서 탄생불을 바이린지에 모시게 됐다고 전해진다. 30억원에 탄생불을 사겠다는 한국인도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결코 한반도에서 약탈한 유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루타 유젠은 탄생불과 함께 수습한 유물이라며 몽골 병사 모습의 목각인형도 내보였습니다. 바이린지에는 1600년대 중반 귤성반이라는 일본 고위 관리가 기증한 바이린지 옛 현판이 남아있는데, 이 현판의 글은 ‘조선국 패곡’이 쓴 것입니다. 패곡(貝谷)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패곡이라는 호를 사용하는 조선 선비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바이린지에는 이 외에도 한반도에서 건너온 것이 확실한 유물이 여러 점 있는데, 이 유물들에 대해 하루타 유젠은 바이린지로 언제 어떻게 오게 됐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쓰시마의 사찰과 신사는 바이린지처럼 한반도에서 건너온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것이 매우 일반적입니다. 쓰시마에 있는 사찰치고 한반도에서 건너온 유물을 한두 점 갖고 있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심지어 한국 불상을 모신 마을회관도 있습니다. 개인이 자신의 집에 보관하는 것도 있습니다.
1973년 나가사키현 교육위원회가 쓰시마 전역을 조사해서 발간한 <쓰시마의 문화재>를 보면, 한반도에서 조선시대 이전에 만들어져 쓰시마로 건너온 불상이 115점이며, 이 가운데 금동불상만 10여점에 이릅니다. 현재 국내에 있는 조선시대 이전 불상과 금동불상보다 많습니다. 게다가 이는 1973년 당시 확인된 것만 집계한 것으로, 실제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문제는 한반도에서 건너온 이들 유물들의 정확한 출처, 쓰시마로 건너온 경위가 불분명하다는 점입니다. 그 어느 곳에서도 왜구가 약탈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일본 쓰시마의 사찰인 엔쓰지가 소장하고 있는 고려 금동약사여래좌상. 엔쓰지는 이 불상을 본존불로 모시고 있는데 불상 전신에 불에 그을린 흔적이 남아있다.
쓰시마의 또다른 사찰인 엔쓰지(圓通寺) 법당에는 높이 57.4㎝의 금동약사여래좌상이 본존불로 모셔져 있습니다.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 고려에서 만든 금동불인데, 누가 보더라도 국보나 보물로 지정될만큼 뛰어난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불상에는 전신에 불에 그슬린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습니다. 왜구가 약탈한 흔적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엔쓰지 주지인 요네다 아키토시(65)는 “500년쯤 전에 조선 국왕이 보낸 것으로 전해내려오고 있다. 왜 불에 그을렸는지는 모르지만, 혹시 흠집이 날까 봐 손을 대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다”고 말합니다.
한·일 근세사와 쓰시마 한국 유물 전문가인 최차호 부산초량왜관연구회장은 “한국인 개인이 쓰시마의 한반도 유물을 한두점씩 비정상적 방법으로 가져오는 것은 말썽만 일으킬 뿐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한국 정부나 이에 버금가는 기구가 공식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해야 할 것은 쓰시마에 있는 우리 유물의 현황과 보관 상태를 먼저 파악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몇몇 학자나 전문가들이 개인적으로 이런 노력을 했으나, 우리 정부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안타깝다”고 말합니다.
글·사진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나가사키현 교육위원회가 1973년 쓰시마 전역을 조사해서 발간한 ‘쓰시마의 문화재’ . 한반도에서 조선시대 이전에 만들어져 쓰시마로 건너온 불상이 115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