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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과거의 풍경으로 현재를 이해하기

등록 2014-12-12 20:21수정 2014-12-13 10:08

다큐멘터리 <맨 온 와이어>(2009)
다큐멘터리 <맨 온 와이어>(2009)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1974년 8월7일 아침. 뉴욕 세계무역센터, 일명 ‘쌍둥이 빌딩’ 옥상의 두 꼭짓점을 연결한 줄 위에 스물다섯살 청년 필리프 프티가 서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의 꼭대기와 꼭대기를 연결한 밧줄은 겨우 엄지손가락 굵기였다. 지상 411.5미터, 110층 높이 건물 사이를 아무 안전장치 없이 걸어다닌 남자. 45분. 그가 구름 위에 머문 시간. 그가 지구의 중력과 싸워 이긴 시간.

다큐멘터리 <맨 온 와이어>(2009)는 마법사 하울처럼 ‘공중 산책’을 즐긴 곡예사 프티의 이야기다. 세찬 바람에 휘청이면서도 까마득한 허공 위를 웃으며 걸어간 오래전 무용담이 매우 세련되고 우아한 방식으로 재구성된 작품이다. 조금 유별난 곡예사의 이야기가 이토록 선명하게 내 맘속에 새겨진 까닭.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세계무역센터를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추억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세계무역센터의 마지막을 알고 있다. 13년 전 그 날 힘없이 주저앉은 쌍둥이 빌딩을 전세계가 목격했다. 그 ‘최후의 순간’만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맨 온 와이어>가 이 건물 ‘최초의 순간’을 보여준다. 아직 건물 공사가 채 끝나지 않은 1974년 8월7일 아침 쌍둥이 빌딩 사이 줄 위의 곡예사. 그가 유유히 구름 위를 걷던 그때가, 세계무역센터가 맞이한 수많은 아침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아침이었다고 말해준다. 그로부터 27년 뒤의 어느 아침에 이 건물이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알고 있기에 그날 아침의 장난기 가득한 외줄타기가 더 애틋해 보인다. 그 순간만큼은 쌍둥이 빌딩이 ‘뉴욕의 랜드마크’가 아니었다. 자신의 어깨 위에서 곡예사가 뛰어노는 걸 허락한, ‘인심 좋은 키다리 아저씨’였다.

다큐멘터리 <맨 온 와이어>를 만든 제임스 마시 감독이 이번엔 극영화 <사랑에 대한 모든 것>(사진)을 만들었다. <노팅 힐>, <러브 액추얼리>, <어바웃 타임>의 제작사인 워킹타이틀 작품이라는 말만 듣고 달달한 로맨스 영화를 기대한 이들이 많겠지만, 사실 이 영화는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의 전기 영화에 가깝다. 사랑에 대한 ‘어떤 것’만을 담아낼 때 영화는 달달해진다.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을 담은 이 영화는 그래서 마냥 달달할 수 없다. 기대했던 로맨스가 기대했던 방식으로 전개되지 않아서 당황하는 관객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겐 퍽 아름다운 영화였다. 참 안타까운 사랑이었다. 이제는 잊히고 만 어떤 이의 과거를 아주 소중하게 다루는 감독의 태도가 특히 좋았다.

우리 모두 스티븐 호킹의 현재를 알고 있다. 휠체어에 힘없이 주저앉은 그의 사진을 자주 보았다. 그 ‘무력한 오늘’만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활기찬 어제’를 보여주며 영화는 시작한다. 청년 스티븐 호킹이 자전거를 타고 캠퍼스를 내달리는 첫 장면. 그에게도 페달을 밟는 튼튼한 두 다리가 있었고, 여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초반의 많은 장면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지금, 그의 두 다리와 목소리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 우리에게, 대학생 호킹의 발을 따라 힘차게 구르는 자전거 바퀴가 더 애틋해 보인다. 화염에 휩싸인 세계무역센터를 지켜보았기에 그 옛날 곡예사의 발밑에 서 있던 쌍둥이 빌딩이 더 애틋해 보이는 것처럼.

루게릭병으로 조금씩 힘을 잃어가던 그가 처음 휠체어에 앉는 순간. 더는 자신의 두 발로 지구의 중력을 밀어내며 일어설 힘이 없단 걸 인정하고야 마는 그때. 한참을 망설이다 털썩, 휠체어에 주저앉은 호킹이 아내를 보며 떠듬떠듬 말한다. “여기엔 잠깐만 앉을 거야.” 그러나 우리 모두 알다시피 다시는 휠체어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다시는 자전거를 타지 못했다. 다시는….

김세윤 방송작가
김세윤 방송작가
지구의 중력과 싸워 이긴 필리프 프티와 달리 이번엔 지구의 중력과 싸우다 완벽하게 패배한 스티븐 호킹의 이야기다. 줄 위에서 45분을 버틴 남자의 인생을 들려준 감독이 이번엔 휠체어 위에서 40여년을 버틴 남자의 삶을 보여준다. 하지만 과거의 풍경으로 인해 현재의 풍경화가 비로소 완전해지는 연출은 이번에도 같다. 스티븐 호킹 못지않게 제임스 마시에게도 ‘시간의 역사’가 중요하다.

누군가의 현재를 충분히 이해하려면 그 사람이 무언가를 잃어버리기 전, 그 사람이 무언가를 떠나보내기 전의 시간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그가 상실한 ‘시간’이 덜 막연해진다. 그래야 우리가 아직 잃지 않은 모든 것이 더 소중해진다. 제임스 마시의 영화에서 난 그걸 배웠다.

김세윤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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