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드라마 <그해, 비가 그치지 않던 곳>
[토요판] 김선영의 드담드담
대만 드라마 <그해, 비가 그치지 않던 곳>
대만 드라마 <그해, 비가 그치지 않던 곳>
2009년 8월, 태풍 모라꼿이 대만을 강타했다. 700명 이상의 사망자와 실종자, 수십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산사태로 마을 전체가 토사에 매몰된 지역도 있었다. 역사상 최악의 태풍으로 기록된 모라꼿은 곧 태풍 이름 목록에서도 삭제됐다. 하지만 상처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당시 총통 마잉주가 이끌던 대만 정부는 치유는커녕 늑장대처와 책임회피로 일관하며 피해를 더 키웠다는 비판에 휩싸였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많은 이들이 모라꼿의 비극을 떠올린 이유다.
정부가 책임지지 못한 피해자들의 치유는 종종 상처에 공감하는 공동체의 몫이 된다. 대중문화의 위로적 기능이 빛을 발하는 순간도 이런 위기의 시절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많은 대중문화예술인들이 음악으로, 이야기로 회복을 기원한 것처럼 대만에서도 모라꼿이 남긴 상처를 치유하려는 문화적 위로의 시도가 이어졌다. 2010년 대만 공영방송 피티에스(PTS)에서 방영된 드라마 <그해, 비가 그치지 않던 곳>(那年,雨不停國)도 그런 위안의 노력 가운데 하나다. 모라꼿으로 가족과 집을 잃은 피해자의 시점을 따라가며 비극 앞에 위태롭게 선 인간의 불안한 심리를 섬세하게 조명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17살 소녀 우청(젠만수)이다. 가족을 모두 잃고 홀로 남은 그녀는 삼촌의 집으로 옮겨오는데 하필이면 그곳은 대만에서 비가 제일 많이 내리는 지역에 위치해 있다. 그치지 않는 빗소리는 우청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고, 삶을 포기한 듯한 그녀의 행동은 근처에 사는 동갑내기 소년 복해(장수하오)의 시선을 끈다. 그리고 소년을 만난 뒤부터 생에 대한 의지도, 희망도 없던 우청의 삶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긴다.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미덕은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섬세한 접근과 신중한 치유의 모색에 있다.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에 대한 대중문화적 교과서로 봐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참사를 볼거리로 전시하거나 극적인 신파로 흥미를 자아내는 재난물과는 차원이 다르다. 고통을 대면하기가 두려워 세상과 벽을 쌓은 우청이 바깥으로 나오는 과정은 답답할 정도로 더디지만 그만큼 더 깊은 이해를 이끌어낸다. 복해를 비롯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들이 선의와 상관없이 자꾸만 실수를 반복하는 모습 역시 공감과 치유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보여준다. 음악, 첫사랑, 가족이라는 상투적 치유 장치가 결코 안이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 그처럼 상처를 대하는 이 작품의 조심스럽고 신중한 태도 덕분이다.
얼마 전 세월호에서 생존한 단원고등학교 학생이 자살을 시도했다는 비극적 소식이 전해졌다. 참사 당시 많은 이들이 강조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관리가 과연 잘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새삼 의심하게 만든 사건이다. 당장 세월호 유족을 대하는 이 정부의 억압적 자세만 봐도 그 의심은 확신으로 굳어진다. 하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적 고통을 향한 시선은 오죽하겠는가. 며칠 전의 그 뉴스와 <그해, 비가 그치지 않던 곳>은 비극의 목격자인 우리가 앞으로도 더 열심히, 더 자주 세월호의 상처를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를 알려준다.
김선영 티브이평론가
김선영 티브이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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