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지난해 이맘때. 분당~수서 간 고속화도로를 달리던 어느 날. 차가 많지 않아 다들 속력을 내던 아침. 앞차가 급히 브레이크 밟는 게 보였다. 덩달아 속도를 줄인 내 앞으로 갑자기 고양이가 뛰어들었다. 허둥지둥. 폴짝폴짝. 겨우 서너 걸음 뛰다 말고 내 차 밑으로 사라진, 아주 작은 새끼 고양이. 깜짝 놀라 룸미러를 살폈다. 다행이다. 살아 있다. 겁에 질려 주저앉은 곳이 마침 차도 한복판, 내 차의 양 바퀴 사이였던 것이다.
뒤차 역시 얼른 브레이크 밟는 게 보였다. 녀석이 또 한 번 바퀴와 바퀴 사이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게 다였다. 룸미러가 내게 보여준 건 거기까지였다. 하필 고속화도로. 잠시 차를 세우고 녀석을 살피러 갈 수도 없는 상황. 무사할까? 괜찮을까? 살아서 이 도로를 벗어날 수 있을까? 안 될 거야, 아마. 혼자 묻고 답하는 기분이 퍽 언짢았다.
다음날 아침. 다시 한 번 분당 수서간 고속화도로. 조금만 더 가면 바로 그 자리. 아무 흔적도 남아 있지 않기를. 억세게 운 좋은 녀석이었기를. 제발 제발 제발…. 그러나, 하아…. 어제 아침 허둥대던 ‘생물’이 오늘 아침 얼어붙은 ‘이물’이 되어 거기 있었다. 동그랗게 몸을 말던 녀석이 납작하게 죽어 누워 있었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자기 새끼의 죽음을 엄마는 알고 있을까? 모를 거야, 아마. 혼자 묻고 답하는 기분이 전날보다 더 언짢았다.
하지만 불과 며칠 만에 나는 무덤덤해졌다. 그 길을 달리는 게 곧 아무렇지 않았다. 나는 바빴고, 바빠서 빨리 가야 했고, 빨리 가다 보면 겨우(?) 그런 일로 계속 언짢아할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어느 날 그 길에서>(2006·사진)를 보았으면서 나도 별수 없이 그리되고 말았다.
일명 ‘로드킬’이라 불리는 길 위의 죽음을 3년 동안 추적한 기록. 수많은 야생동물이 허망하게 생을 마감한 현장마다 다큐멘터리 감독 황윤이 서 있다. 야생동물 서식지를 두동강 내며 시원스레 뻗은 도로야말로 경제발전의 증거라며 환호하는 나라에서, 두동강 난 야생동물 사체쯤은 이미 아무렇지 않은 풍경이 되어 있었다. <어느 날 그 길에서>는 그렇게 매일 수천마리가 죽어나가는 도로 위에 관객을 세워놓는다. 알고 나면 무덤덤할 수 없는, 그들 각자의 ‘삶’을 보여준다. 알고 나면 못 본 체할 수 없는, 그들 각자의 ‘죽음’을 애도한다.
로드킬당한 엄마 곁을 떠나지 못하던 새끼 족제비. 같은 자리에서 똑같이 차에 치여 죽는다. 먹이를 찾아 위험한 도로를 건너던 만삭의 고라니. 차에 치인 다음에야 뱃속에 있던 아이들을 도로 위에 쏟아낸다. 차에 치이고도 극적으로 목숨을 건진 멸종위기 동물 삵. “88고속도로에서 만났고, 앞으로 팔팔하게 살아가라”는 의미로 ‘팔팔이’란 이름이 붙여진다. 겨우 기운 차린 녀석을 사고 현장에서 30㎞ 떨어진 야산에 풀어주었더니, 전에 사고당한 바로 그 자리에서 얼마 뒤 차에 치여 죽는다. 단지 자기가 살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도로 12개를 무사히 건넌 팔팔이는, 끝내 마지막 하나의 도로를 넘지 못하고 굉음을 내며 달려오는 네 바퀴 동물에게 짓밟히고 만 것이다.
2014년을 보내며 <어느 날 그 길에서>를 다시 보는 밤. 아무렇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 정말 아무렇지 않은 게 되어버린 한 해를 생각한다. 무덤덤해지면 안 되는 것들 앞에서 자꾸 무덤덤해지던 나의 1년을 돌아본다. 도로 한복판에 가만히 웅크리고 있던 새끼 고양이. 가라앉는 배 안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던 아이들. 허둥지둥 뛰기 시작한 고양이. 다급하게 객실 창문을 두드리는 사람들. 납작해진 사체를 무심히 밟고 지나는 자동차. 납작 엎드린 유족의 마음을 무심히 밟고 지나치는 사람들. 내 차에만 부딪히지 않으면, 내 바퀴에만 살점이 묻지 않으면…. 내 아이가 죽은 게 아니니까, 내 가족이 가라앉은 게 아니니까….
오늘도 신문에는 101번째 ‘잊지 않겠습니다’가 실렸다. “장교가 꿈이었던 범수에게” 엄마는 “네가 만든 과자와 빵 맛이 그립”다고 편지를 썼다. 사망자와 실종자 304명이라는 숫자는 원래 304개의 삶이었다. 304개의 과자였고 304개의 빵이었다. 도로 위 납작한 얼룩이 바로 어제까지 폴짝폴짝 뛰어다닌 고양이였던 것처럼. 새해에도 그걸 잊지 않으려 한다. 무덤덤해지지 않으려 한다. 거대한 로드킬의 시대를 사는 ‘팔팔이’들이 원래 자신이 있던 자리로 무사히 돌아갈 때까지. 이름처럼 다시 그들의 하루가 팔팔해질 때까지.
김세윤 방송작가
김세윤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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