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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미생’ 원작자 윤태호 “내가 장그래다”

등록 2015-01-30 21:39수정 2015-01-31 12:32

[토요판] 커버스토리 / 장그래 인터뷰, 윤태호 인터뷰

‘미생 신드롬’의 주인공인 윤태호
그의 성장담에 우린 왜 열광했나
관련기사 : “회사 안은 전쟁터지만…맞아, 밖은 지옥이었어”

<미생>의 원작자 윤태호(46) 작가를 지난 27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지하철 오리역 인근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가히 신드롬이라고 볼 수 있는 ‘미생 현상’에서 아이러니한 면은 그의 애초 기획이 철저히 ‘사회’가 아닌 ‘개인’에 맞춰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개인의 성장담’을 그렸고, 그것은 장그래법을 비롯해 비정규직 논란으로 번졌으며, 직장인들의 필독서로 불리며 사회적으로 읽혔다. 왜 우리 사회는 개인의 성장담에 이리 열띤 반응을 보인 것일까. 그 이유를 살펴보기 위해 그 ‘성장담’에 집중해보기로 했다. 윤 작가는 “나는 자기 자신을 잘게 쪼개 무대 위에 여러 모양으로 세우는 사람이다. 즉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에 나 자신이 투사돼 있다”고 말했다. 그가 <미생>의 등장인물에 무엇을 투사했는지, 또 그 인물들과 어떤 상호작용을 했는지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 미생의 원작자 윤태호 작가가 좋아하는 단어는 ‘마땅함’입니다. 2008년 <이끼>의 성공 이후 10년도 더 묵혀둔 아이템인 ‘바둑’과 ‘창업’이란 아이템을 다시 꺼내든 데에는 그 나름의 ‘마땅함’이 필요했다고 단행본 1권 머리말에 적었습니다. 여기서 ‘마땅함’이란 자기 자신이 수긍할 수 있는 타당한 이유입니다. <한겨레>는 미생 신드롬의 ‘마땅함’을 찾기 위해 윤 작가를 만났습니다.

지난 27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의 화실에서 윤태호 작가를 만났다. “장그래와 윤태호의 싱크로율(정확도)은 얼마?”라는 질문에 그는 “외모는 하나도 안 닮았지만, 20대 초반에 크게 좌절한 점은 닮았다”고 짧게 답했다. 그와 대화할수록 장그래 속에서 윤태호를, 윤태호 속에서 장그래를 찾을 수 있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지난 27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의 화실에서 윤태호 작가를 만났다. “장그래와 윤태호의 싱크로율(정확도)은 얼마?”라는 질문에 그는 “외모는 하나도 안 닮았지만, 20대 초반에 크게 좌절한 점은 닮았다”고 짧게 답했다. 그와 대화할수록 장그래 속에서 윤태호를, 윤태호 속에서 장그래를 찾을 수 있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괴물이 돼가는 게 아닐까 끊임없이 반성한다”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하나의 주제에 크게 호응할 때, 이른바 ‘신드롬’(syndrome)이 생긴다. 2010년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저작 <정의란 무엇인가>가 전세계 어느 곳보다 국내 도서시장에서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내며 신드롬을 일으켰고, 2012년엔 연초부터 ‘안철수 현상’이 부상해 대통령 선거구도를 뒤흔들었다. 다시 2년이 지난 2014년, 대한민국은 가히 ‘미생 신드롬’을 앓으며 한해를 마무리했다.

그렇다면 미생은 어떻게 신드롬이 됐을까. 티핑포인트(극적인 변화의 순간)를 마련한 것은 ‘드라마’였다. 사실 미생은 2012년 1월부터 연재를 시작한 웹툰이다. 원작자인 윤태호(46) 작가는 2012년에 이미 <미생>으로 대한민국 콘텐츠 대상 만화부문 대통령상을 수상했고, 그해를 대표하는 만화가로 자리잡았다. 연재는 이듬해까지 인기리에 이어져 2013년 7월 마감됐다. 두달 뒤인 9월 단행본으로 출간한 미생은 1년 만에 90만부를 돌파하며 출판계의 ‘신데렐라’로 부상했다. 지난해 10월 티브이엔에서 드라마 <미생> 방영을 시작하자 한달 만에 원작 단행본이 110만부 더 팔렸다. 최근 출판시장에서 드문 200만부 돌파였다.

출판시장만 도드라진 것이 아니다. 바둑용어 미생마(未生馬: 아직 살아 있지 못한 말)의 준말인 ‘미생’은 언제 잘릴지 모르는 직장인들의 처지를 상징하는 단어가 됐다. 특히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적 의제로 급부상했고, 심지어 비정규직의 계약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늘리는 것을 골자로한 정부의 ‘비정규직 종합대책’은 한 언론사에 의해 미생의 주인공 이름이 붙어 ‘장그래법’이라고 불렸다. 장그래법이란 명칭은 그 자체로 논란이었다. ‘비정규직의 처지를 오히려 악화시키는 법에 장그래의 이름을 붙이는 게 기만적’이라는 비판이 뒤따랐고, 정부는 비정규직의 차별이 실질적으로 개선되는 ‘장그래 구제법’이라고 맞섰다. 모두 ‘미생 신드롬’의 단면들이었다.

이처럼 ‘미생’이 사회적인 맥락에서 읽히고 있지만, 윤 작가의 애초 기획의도는 철저히 ‘사회’가 아닌 ‘개인’에 맞춰져 있었다. “개인들의 성장담을 그리고 싶었다”는 것이 윤 작가의 기본 취지였다. 그렇다면 왜 우리 사회는 ‘이 개인들의 성장담’에 공명했던 것일까. 그 이유를 종합적으로 살피는 것은 쉽지 않지만, 실마리를 잡기 위해 신드롬을 잉태한 ‘성장담’을 살펴보고자 했다. 작가가 이 작품에 어떤 혼을 실었는지, 작품과 작가는 어떤 상호작용을 했는지를 면밀히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어쩌면 미생의 대사처럼 ‘그가 하는 일이 바로 윤태호 그 자신’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인터뷰는 지난 27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지하철 오리역 인근 그의 서재에서 진행됐다. 서재 옆방은 5명의 문하생과 함께 쓰고 있는 화실이다.

정치권에서 장그래 들먹이는 모습 씁쓸

-요즘 찾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인터뷰와 강연 요청만 하루에 10개씩 온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요청이 쏟아지는데, 거절하는 것도 일이어서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다.”

-윤태호 작가를 찾는 사람이 많아진 것은 미생이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 되어서가 아닐까. 심지어 최근 정부의 비정규직 종합대책에 ‘장그래법’이란 이름이 붙었다. 법안에 만화 주인공 이름이 붙은 것은 거의 처음이 아닐까 싶다.

“사실 비정규직 문제는 고질적이고, 그동안 이 문제를 어떻게 개선할지 많은 고민들이 있었지만 의제화가 잘 되지 않았다. 그런데 미생 단행본에 이어 드라마가 화제가 되니까, 정치권에 있는 분들도 ‘비정규직 문제가 이렇게 대중의 관심사구나’라는 것을 체감한 것 같다. 그런데 이게 약간 허무한 것이, 그동안 많은 분들이 비정규직 문제 개선을 위해 헌신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내놓으면서 일종의 ‘웅변’을 해왔는데, 고작 만화나 드라마가 무엇이라고 이제야 이슈가 된다. 또 분위기가 형성되니까 정치권에선 말 한마디라도 얹으려고 다시 만화를 들먹인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 좀 씁쓸하다. 그래서 기존에 고민하고 웅변을 해왔던 분들에게 이런 말을 전하고 싶다. 죽지 마시라. 정치권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이니까.”

-방금 언급한 부분은 사실 언론인들이 상당히 고민하고, 또 때로는 좌절하는 지점이다. 예를 들어 기자들이 쌍용차 정리해고 문제에 대해 숱한 기사들을 써왔지만, 공지영 작가의 <의자놀이>만한 파장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미생으로 인해 비정규직 문제가 의제화된 것을 보면, 과연 언론은 어떻게 해야 중요한 사안을 사회적 의제로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된다.

“그래도 몇몇 기자분들은 굉장히 고민을 하는 것이 느껴진다. 정기구독하는 <한겨레21>의 기사 중에 대형마트나 음식점, 공장에 기자들이 직접 비정규직 노동자로 취직해 일해보고 쓴 르포들을 인상 깊게 읽은 적이 있다. 르포 기사가 주는 새로움이 있기 때문에 더 읽히는 측면도 있었던 것 같다. 언론 입장에서도 어떻게 하면 읽힐지 고민이 많을 것 같다.”

-단행본 1권의 머리말에서 ‘어린 시절부터 바둑에서 왜 이기고 졌는지를 따져봤던 그 아이가 사회에 나가 한 수 한 수 걸음을 옮기는 이야기가 바로 미생’이라고 했다. 즉, 작가는 ‘개인의 성장 이야기’를 그렸다는 것인데, 그 이야기가 굉장히 사회적인 맥락으로 읽히고 있다.

“사실 비정규직 문제에 초점을 맞춰서 질문을 해오면 제 대답이 빈곤해질 수밖에 없다. 왜냐면 비정규직 문제도 이 작품 안에서는 어느 한 부분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장그래라는 인물이 계약직 사원이지만, 그 신분이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는 아니다. 애초에 미생을 하면서 어떠한 ‘주의, 주장’을 담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미생 신드롬의 원인은 무엇일까?

“직장인들이 별로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스스로의 삶을 재발견한 측면이 있다. 그동안 어디에서도 다뤄주지 않던 자신들의 일상을 미생에서 보고선 직장인들은 ‘그래 맞아, 우리는 이것 때문에 울고 웃었지’라고 자각한 것이다. 또 미생에는 팀장, 대리, 신입사원에서부터 워킹맘까지 직장인들이 자기 자신을 얹을 수 있는 캐릭터가 많이 나왔다. 감정이입의 대상이 많은 것이다. 또 미생이 직장인들의 속내를 건드리기도 했다. 겉으로는 시니컬하게 ‘그냥 돈 벌러 회사에 다니는 거지’, ‘우리는 회사의 노예’, ‘노예가 회사에서 무슨 자아 성취냐’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인터넷 커뮤니티 등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정말 일을 잘하고 싶어하고, 그렇게 되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러면서 우리가 다들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구나라고 자기 자신을 연민의 대상으로 볼 수 있게 만든 지점이 있다. 회사에서 고군분투했던 자신의 모습을 미생에서 발견하면서 스스로 위안을 받는 것이다.”

윤태호 작가가 <한겨레> 독자들을 위해 새해 인사를 보냈다.
윤태호 작가가 <한겨레> 독자들을 위해 새해 인사를 보냈다.
집필하다보니 완전체 된 장그래
아무리 명석해도 무리있는 설정
거꾸로 박대리는 성장할 수 없을까
고민하다보니, 장그래로 인해
달았던 날개도 껍데기일 수도

너무 기뻐도 함부로 웃지 않고
너무 슬퍼도 함부로 울지 않는다
마음을 벽돌처럼 만들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이 바로 장그래
우는 건 자신 한계 통탄할 때

자신의 인생스토리 써보내는 사람들

-직장인들끼리 자조적으로 ‘너나 내가 없어도 회사는 잘 돌아간다’고 하지만, 미생은 거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 “그래도 이 일이 지금의 나야”라고 한다.

“누구 한명 때문에 좌우되는 회사는 굉장히 위험한 회사다. 개인으로 보면 자신의 존재감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회사 입장에서는 특정한 누군가로 인해 회사가 출렁이면 매우 위험하다. 그래서 누구든 대체가 가능한 구조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 자신이 부품밖에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왜냐면 밖에 나가면 그 사람은 회사를 대표하고, 한 사람의 개성적인 지점이 회사를 대표하기도 한다.”

-작가가 보는 주인공 장그래는 어떤 인물인가?

“장그래를 이해하려면 일단 바둑을 두는 한국기원 연구생을 알아야 한다. 그 연구생들은 대부분 5, 6살 때부터 바둑을 두고, 이미 그때부터 아마급수로 3, 4급 정도가 될 만큼 굉장히 잘 둔다. 그 정도 수준이 되는 아이의 부모는 종종 자려고 누우면 어디선가 딱딱 소리를 듣는다. 부모가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해서 찾아가보면 야밤에 꼬맹이가 혼자 머릿속에 생각난 수가 궁금해서 바둑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일을 겪으면 부모는 공포에 빠진다. 이 아이가 이창호, 이세돌처럼 될까, 아니면 하다하다 결국 프로기사도 못 되고 끝날까. 부모 입장에서는 자녀가 대단한 사람이 되길 바라면서도 평범하길 바란다. 친구들을 만나고 각 나이마다 겪을 성취와 좌절의 경험을 다른 또래 친구들과 비슷하게 갖길 바라는데, 바둑을 두면 일차적으로 그런 것들과 멀어지게 된다. 따라서 부모 입장에선 판단을 해야 한다. 대부분의 부모는 야밤에 혼자 바둑 두는 아이에겐 못 당한다. 그런데 그런 아이들의 대다수는 프로 바둑기사가 되지 못한다. 부모와 자녀 쌍방이 서로에게 굉장히 미안해지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자녀는 부모가 자신을 지원해줬는데도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미안함이 있고, 부모는 이럴 줄 알았으면 평범한 걸 누리게 키워줄걸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저는 그렇게 된 사람이 사회에 나왔을 때의 각오라는 것이 남다를 것이라고 봤다. 바둑에서 멀리 떨어지고 싶겠지만, 바둑에서 얻은 지혜로 앞길을 헤쳐나가려 할 것이고, 스스로를 발전시키려 무진 애를 쓸 것이다. 만화에서 보면, 장그래는 자기 자신의 한계를 통탄해서 운 적은 있지만, 주변 사람들 때문에 힘들어서 운 적은 없다. 기본적으로 장그래는 너무 기뻐도 함부로 웃지 않고, 너무 슬퍼도 함부로 울지 않는다. 마음을 벽돌처럼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인 것이다. 바둑을 그만둘 때도 스스로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만뒀다고 하지, 다른 누구를 탓하지 않는다. 실제 장그래가 우는 건 자신의 한계가 너무나 명확히 드러났을 때, 그 한계를 통탄해서 운 거다.”

-우리 사회에서 특정 분야에 몰두했던 사람에게 주어지는 결과라는 것이 장그래와 비슷한 경우가 꽤 있다. 특히 스포츠 등 정규 학과과정에서 벗어난 진로를 택할 경우, 아주 뛰어난 소수에 들어가지 못하면 장그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다.

“스포츠를 포함해 사회 모든 분야가 엘리트를 강요한다. 그 엘리트에 편입되지 못하면 낙오하는 구조다. 실제 그런 분들이 미생을 보고서 ‘자신의 이야기’라며 연락이 오곤 한다. 어떤 분은 자신의 인생을 장문의 글로 써서 보내오기도 한다.”

-바둑이란 정적인 두뇌게임과 전장과 같은 종합상사를 함께 소재로 삼은 이유가 있나?

“일단 바둑은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 지혜와 잠언, 격언 등이 그 안에 있다. 한판의 바둑이 세상을 반영하고, 개인으로선 하나의 세계를 운영하는 것이 된다. 즉 삶을 은유하는 좋은 도구다. 바둑이 싸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명상의 도구로도 훌륭하다. 한판을 두고 복기를 하는 과정에서 ‘저 수에서 욕심을 부렸네’, ‘저 수에서 용기가 부족했네’라는 자기반성을 할 수 있다. 바둑에 담긴 지혜들이 실제 삶에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종합상사를 그린 이유는 보다 개인의 실적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직장이기 때문이다. 사실 꼭 종합상사라기보단 그냥 회사를 그리고자 했다.”

-장그래는 인복이 있는 신입사원이다. 실제 직장에서는 오상식 차장이나 김동식 대리 같은 너그럽고 이타적인 직장 상사들을 만나기 어렵다. 이런 좋은 사람들을 장그래에게 붙여준 이유가 있나?

“그건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자기 스스로가 좋은 사람이고 싶기 때문이다.

누구나 ‘내가 과장, 대리, 사원이라면 이렇게 일해야지’라고 생각한 지점들을 모아놓은 곳이 영업 3팀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모여 일을 잘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직장인들의 꿈동산 같은 부서를 하나 만들었다.”

좋은 사람들의 총합 투사된 오 차장

-오 차장 같은 리더가 실제 직장에선 드물지 않을까?

“오 차장은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들의 총합이 많이 투사됐다. 예를 들어 퇴직한 옛 회사 선배가 돈 보따리를 싸들고 청탁하러 온 장면에서 내가 아는 좋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를 떠올렸다. 그 사람이라면 멋있게 돈 보따리 내던지면서 ‘이게 말이 돼’라고 소리질렀을까. 아니면 상대의 처지를 십분 이해하면서 상처 받지 않게 돈을 돌려줬을까. 아마 후자였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애정어린 쓴소리는 아끼지 않았을 거다. 실제 제 주변에 그런 좋은 분들이 많다.”

-대사 중에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바둑이 있다’라는 말이 있다. 이 대사가 나온 에피소드도 인상적이다. 우유부단한 태도로 협력업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아이티영업팀 박 대리에게 장그래가 ‘무책임해지세요’라는 쪽지를 전하며 훈수를 두고, 박 대리는 오히려 ‘모두 내 탓입니다’고 자책한다. 질책이 쏟아질 줄 알았던 자리는 원만하게 정리되고, 장그래는 비루해진 훈수에 민망해한다.

“이 에피소드는 쓰면서 고민을 많이 했다. 박 대리로 통칭되는, 회사에서 적극적으로 일하지 않는 누군가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은 정말 능력이 없을까. 바보일까. 그렇지 않다는 거다. 처음 원고를 구상할 땐, 박 대리가 자신을 믿어주는 장그래 앞에서 날개를 다는 것만 생각했다. 하지만 집필을 하다 보니 장그래가 완전체가 되었다. 아무리 바둑을 뒀던 명석한 아이라고 해도 좀 무리가 있는 설정이었다. 그렇다면 거꾸로 박 대리는 스스로 성장할 수 없는 사람일까. 그래서 고민을 하다 보니, 장그래로 인해 달았던 날개까지도 이 사람의 껍데기일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박 대리가 장그래에게 “당신이 나의 가난한 껍질을 벗겨줬다”는 말을 하는 건가?

“그렇다. 작가로서도 무언가 자신의 틀을 깼다는 쾌감을 느꼈던 순간을 돌이켜봤다. 그 깨달음이 있기까지 수많은 간접경험과 남들의 조언도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성장한 것은 아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나의 내면이 어떤 상태에 이르렀을 때, 새로운 판단을 내리고 나아갈 수 있었다. 박 대리의 경우도 늘 내면의 갈증이 있었던 것으로 봐야 한다.”

-워킹맘을 다룬 에피소드에서는 아내의 입장만 다루지 않고, 남편 쪽도 다뤘다. 이유가 있나?

“그 에피소드를 처음 시작했을 때, 댓글로 남편을 욕하는 분들이 무척 많았다. 부부가 퇴근하고 대화하는 장면에서 아내는 빨래를 개고 있는데, 남편은 그냥 소파에 앉아 말만 하는 그림이 있었다. 여느 집안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풍경이라 그렇게 그렸는데, 댓글에서 난리가 났다. 남편이 완전 나쁜 놈이 된 거다. 미시적인 지점에서 이슈가 생기고, 댓글로 다툼이 일어나서 고민이 더 깊어졌다. 그래서 남편은 왜 경력을 쌓아가는 아내에게 회사를 그만두라고 하는 걸까, 그 내면의 심리는 무엇일까를 이야기에 담았다. 남편은 결국 보수적인 한국의 가족문화에서 한번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자신을 희생하면서 가장으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결국 남편과 아내 모두, 이 구조의 피해자다. 한쪽만의 잘못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내도 남편의 속내를 알고, 서로를 더 이해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다소 공익적으로 풀었다.”

내 후회 들어간 ‘반집’ 곱씹는 장면
난 성공한 만화가로 보이겠지만
실상은 괴물이 되어있을 수도 있다
문하생 시절, 왜 남에게 상처 줬을까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괜찮은 걸까

갑을관계 잘 아는 분야 아니지만
신인시절 출판사에 과도하게 굽신
지금은 은연중에 목소리 커지더라
신인 때부터 내 생각 관철했어야
출판사도 신인작가 차별 말아야

윤태호 작가는 다섯명의 문하생과 공동작업을 한다. 윤 작가는 지난해 8월 <한겨레> 토요판에 연재한 <인천상륙작전> 연재를 마친 뒤 <파인>과 <알 수 없는 기획실>을 연재중이며 건강상의 이유로 <파인> 연재를 쉬고 있다. 오는 4월부터 <미생> 시즌2를 연재할 예정이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윤태호 작가는 다섯명의 문하생과 공동작업을 한다. 윤 작가는 지난해 8월 <한겨레> 토요판에 연재한 <인천상륙작전> 연재를 마친 뒤 <파인>과 <알 수 없는 기획실>을 연재중이며 건강상의 이유로 <파인> 연재를 쉬고 있다. 오는 4월부터 <미생> 시즌2를 연재할 예정이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이상한 변화… 요즘 사람 만나기 무섭다

-만화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에피소드가 박 과장이 요르단 중고차 사업에서 저질렀던 비리를 밝혀내는 것이었다. 인상적인 부분은 박 과장의 잘못을 밝혀내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떻게 그가 악인이 됐는지, 그 과정을 묘사한 것이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자신이 매우 큰 일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본인이 500억원 규모의 사업을 수주해 수십억원을 남기면, 회사는 보너스 한번, 회식 한번에 끝이다. 그럼 그 보상이 과연 적절할까. 많은 직장인들이 그런 고민을 하리라고 봤다. 특히 재벌체제에서 직장인들이 평생 꿈도 못 꾸는 부를 획득하는 오너를 볼 때, 열패감과 상실감을 느끼지 않을까. 아마 박 과장은 특별한 기지를 발휘해 사업의 성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을 거다. 그런 사람에게 적절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으면 회의감에 빠지지 않을까. 물론 취재를 도와준 분들은 ‘거래 상대방이 개인이 아닌 회사를 보고 거래를 하는 것이고, 개인은 회사를 대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 생각하면 곤란하다. 다만 고과를 공정하게 운영할 필요는 있다’고 했다.”

-박 과장의 비리가 밝혀진 뒤, 장그래는 바둑에서 반집패배와 반집승리의 의미를 곱씹는다. 반집으로 패배하면 바둑을 뒀던 그 많은 수들이 의미없는 듯이 보이지만, 반집으로 이겨보면 살아준 돌들이 고맙고 한 수 한 수가 귀하게 여겨진다. 즉 순간순간의 성실한 최선이 반집의 승리를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순간순간을 놓치면 안 된다는 깨달음, 작가 본인의 것인가?

“당연하다. 철저하게 스스로의 후회가 많이 들어간 대사다. 어릴 적 누군가 내게 꿈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만화가가 될 것’이라고 답했지만, 사실 직업 자체가 꿈이 될 순 없다. 만화를 그리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이냐가 꿈의 핵심인데, 남들이 보기에 나는 성공한 만화가일 수 있지만, 실상은 괴물이 되어 있을 수도 있다. 과거 허영만, 조운학 선생의 문하생일 때, 다른 문하생들과 왜 이렇게 불화했을까. 남에게 왜 그리 상처를 줬을까. 왜 이렇게 탐욕적으로 살았을까. 그런 후회들이 많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괜찮은 걸까. 겸손이 아니라 진심으로 불안한 측면이 있다. 내가 나쁜 판단, 무리한 결정을 해오던 습관이 오히려 성공한 작가의 입장에서 더 폭력적으로 나올 수 있다. 그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삶이란 정말 끝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 작가로서 얻은 성취가 그다음 작품에서도 이어질까. 우리 직업의 특성상 순간을 놓치면 한번 얻은 성취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지금 <파인>의 연재를 일시 중단한 것도 건강상의 문제도 있지만, 지금의 이 회오리 안에 있으면 분명 무언가 놓칠 거라는 불안 때문이다.”

-회오리라면 미생과 관련한 현상을 의미하는 건가?

“그렇다. 최근 정치권에서도 여야를 막론하고 자리를 같이하자는 제안이 여섯 군데서 왔다. 진짜 이게 무엇인가 싶다.”

-말씀하신 대로 ‘사회적 성공’이 과정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본다. 결국 권위나 성공에 의해 정당화한 무언가가 결국 옳은 것으로 인식되는, 옳고 그름의 가치관마저 전복되는 상황도 생기곤 한다.

“최근 정말 무서운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그냥 지인들과 함께 차 마시는 편한 자리였다. 그런데 문득 사람들이 내 말에 경청을 하는 거다. 예전에는 서로 말 주도권을 안 뺏기려고 경쟁하곤 했는데, 이제는 내가 말하면 다들 말을 멈추고 경청했다. 너무 불편해서 자리를 피했다. 요즘 사람 만나는 것도 피곤해서 새 취미를 하나 만들었다. 영화 블루레이를 모으고 있다.”

모든 캐릭터에 나 자신이 투사돼 있다

-장그래가 하청업체 임원의 절박한 태도에 동정심을 보이자, 오 차장이 “어디서 동정질이야. 한 가정의 가장한테”라고 말한다. 우리 사회 갑이 을을 대할 때, 필요한 태도가 아닐까?

“사회에서의 갑을관계는 잘 아는 분야가 아니다. 직접 겪어본 것만 얘기해 보면, 신인 시절 출판사에서 요구하는 대로 철저히 맞춰줬다. 마음에 안 드는 조건이어도 받아들이고, 출판사에 과도하게 굽신거렸다. 그런데 이제는 나도 백만부 넘게 책을 팔았고, 은연중에 내 주장을 강하게 펴고 목소리가 커지더라. 문득 ‘내가 어떤 자격을 획득했다고 믿는 순간, 굉장히 무리한 게임에 들어오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돌이켜보면 신인 때부터 목소리를 냈어야 했다. 수없이 다투더라도 협의해서 내 생각을 관철시키는 훈련을 했어야 했다. 출판사도 신인작가, 기성작가 구분하지 않고 그냥 작가로 봐야 한다. 과거에 과도하게 굽신거렸기 때문에 지금에 와선 과도하게 내 생각을 주장하려는 괴물이 돼가는 것이 아닐까, 반성하게 됐다.”

-김동식 대리가 장그래의 과거를 “실패하지 않았다”면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다가오는 문을 열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성공과 실패는 그 열었던 문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달렸다”고 말한다. 스스로 열었던 문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

“수많은 작품들을 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겨우 문 하나 열고 지나갔다는 생각이 든다. 창작자 중에는 여러 유형이 있는데, 나는 자신을 잘개 쪼개서 무대 위에 여러 모양을 세우는 유형에 속한다. 모든 캐릭터에 나 자신이 투사돼 있다. 그래서 스스로의 열패감, 분노를 작품에 투사했다. 기자들은 그런 작품을 사회성이 강하다고 호의를 가져주었지만, 지나고 나서 보면 그건 사회적인 문제를 끌어와 그저 나의 분노를 투사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만약 그때의 작품들을 지금 다시 한다면, 좀 더 각성이 된 상태에서 핵심적으로 사람의 이야기를 풀어갔을 거다.”

-미생 시즌 2는 언제부터 시작되고, 어떤 내용이 담길 예정인가?

“올해 4월부터 시작될 예정이다.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처음엔 창업을 해 회사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그릴 예정이다. 그다음엔 요르단 중고차 부품사업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고, 마지막 에피소드의 주제는 직장인들의 결혼 문화다.”

글 윤형중 기자 hjyoon@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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