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2012)는 인도 청소년 파이가 벵골호랑이 리처드 파커와 227일 동안 바다에서 표류하는 이야기다. 85회 아카데미상 11개 부문 후보에 올라 감독상 등 4개 부문 상을 받은 영화. 작품상까지 받아야 마땅했다고 수많은 평론가가 아우성친 영화. 두 번 보아도 아름답고 세 번을 보아도 여전히 경이로운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고 나면 누구든 한동안은 망망대해를 떠다니게 된다.
우리 모두 파이와 다를 바 없는 처지일 것이다. 쉼 없이 파도에 떠밀리며 기약 없이 표류하는 게 아마 인생일 것이다. 저마다의 리처드 파커 하나씩 태우고 가는 여정이 곧 삶일 것이다. 때때로 으르렁대고 수시로 그르렁대며 끈질기게 곁을 맴도는 호랑이. 내가 쉽게 밀쳐내기도, 내가 먼저 도망치기도 힘든 그 무엇. 내 인생의 딜레마, 혹은 내 인생의 트라우마. 누구에게나 그런 게 한두 가지씩은 있을 것이다. 누구의 마음속에나 호랑이 한 마리씩은 있을 것이다.
엘리노어(제시카 채스테인)의 삶에도 호랑이가 산다. 이름이 리처드 파커는 아니다. ‘외로움’이다. “저 외로운 사람은 다 어디에서 왔을까요?”라고 노래한 비틀스 곡 ‘엘리노어 릭비’(Eleanor Rigby)를 딸 이름으로 지어준 부모님 탓일까. 코너(제임스 매커보이)를 만나 뜨겁게 사랑하고 살갑게 연애하는 동안에도 엘리노어의 보트에는 늘 외로움이 함께였다. 결혼하고 아이 낳은 뒤 부부에게 닥친 어떤 사건으로 인해 엘리노어의 삶이 난파하고부터는 ‘그리움’이라는 호랑이 한 마리가 더 올라탄다. 한 마리도 힘든데 두 마리라니. 외로운 것도 버거운데 그리움까지 감당해야 하다니. 힘에 부친다. 그래서 사라지기로 결심한다. 영화 <엘리노어 릭비>의 원제가 ‘엘리노어의 실종’(The Disappearance of Eleanor Rigby)인 까닭이다.
감독은 ‘엘리노어의 실종’을 두 가지 버전으로 찍었다. 엘리노어 본인의 시선으로 본 실종의 전말, 그리고 남편 코너의 시선으로 재구성한 사건의 전모. 각자의 호랑이한테 휘둘리며 지쳐간 지난 반년의 세월을 <엘리노어 릭비: 그 남자>와 <엘리노어 릭비: 그 여자>에 따로따로 담았다. 같은 시간을 함께 지나온 두 사람이 차례로 증언대에 서는 것이다. 관객을 향해 엇갈린 진술을 하는 것이다. 그다음 이 두 편의 영화를 편집해 <엘리노어 릭비: 그 남자 그 여자>(사진)를 만들었다. 세 편이 동시 개봉해 지금 상영 중이다. 진정한 의미의 ‘3차원’ 시네마. 일방의 이야기가 쌍방의 대화로 바뀌고 평면의 ‘사건’이 입체의 ‘사연’으로 두툼해지는, 퍽 특별한 관람 체험.
“어느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나요? 어느 쪽이 더 나은가요?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요, 동물이 안 나오는 이야기요?”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어른이 된 파이가 묻는다. 리처드 파커 없이 표류한 버전의 이야기를 들려준 다음이다. 관객은 호랑이가 나오는 꿈같은 이야기와 호랑이가 나오지 않는 끔찍한 이야기 가운데 더 끌리는 쪽을 ‘선택’하면 된다. 하지만 <엘리노어 릭비>는 다르다. ‘그 남자 이야기’와 ‘그 여자 이야기’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는지를 묻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관객은 이야기를 ‘선택’하는 대신 이야기를 ‘완성’한다. 그 여자의 슬픔에 그 남자의 아픔을 더한다. 차곡차곡 행간과 여백을 채워가는 덧셈 끝에야 비로소 그들을 덮친 폭풍우의 세기를 온전히 짐작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괜찮아도 괜찮은 걸까?” 견딜 수 없는 슬픔을 어떻게든 견디어내려 애쓰던 엘리노어가 한숨처럼 내뱉은 한 문장. ‘그 남자’가 듣지 못한 ‘그 여자’의 질문을 관객은 듣는다. 코너가 알지 못하는 질문이므로 우리가 답해주어야 한다. 지금, 괜찮아도 괜찮은 건지 매일 자문하는 모든 이들,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보내고 간신히 괜찮은 척 또 하루를 버텨내는 세상의 모든 엘리노어들에게 똑같이 말해주어야 한다. 괜찮아도 괜찮아. 미안해하지 마. 괜찮아지는 건… 정말 괜찮은 거니까.
파이는 이제 괜찮아졌다. 마침내 육지에 닿았고 호랑이는 떠났다. 녀석에게 지지 않으려고 자꾸 더 강해진 덕분에 파이가 살 수 있었다. 엘리노어도 그럴 수 있을까? 때때로 외로움이 이빨을 보여도, 그리움이 발톱을 드러내도, 꿋꿋하게 앞으로의 시간을 잘 버텨낼 수 있을까? 아마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세 편의 영화가 다다른 단 하나의 라스트신을 보면서 엘리노어를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김세윤 방송작가
<엘리노어 릭비: 그 남자 그 여자>
김세윤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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