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8일, 태풍 ‘하이옌’이 필리핀 남동부 해안 지대를 휩쓸었다. 6만채 가까운 가옥이 파괴됐고, 수십만명의 주민들은 길바닥에 나앉았다. 특히 순간 최대풍속 397㎞/h로 역사상 가장 강력한 태풍이 몰아친 타나완 지방은 1275명이 희생됐고, 6m 높이의 쓰나미까지 겹치면서 마을은 초토화됐다.
그로부터 1년 5개월이 흐른 지난 4월15일, 타나완의 ‘파고 바랑가이’(파고 마을) 들녘에 삼각형을 조합한 건축물이 들어섰다. 빈터에 세운 콘크리트 기둥 위에 철골 삼각형을 겹겹이 포갠 듯한 20평 남짓한 이색 건축물, 언뜻 동남아 사원을 연상시키는 이 곳은 새로운 개념의 ‘재난 피난처’다. 전후좌우 4면이 모두 개방됐고, 바람이 자유롭게 오간다. 하지만 순간 최대풍속 350㎞/h의 초대형 태풍에도 견딜 수 있다. 더욱이 무작정 버티다 일시에 주저앉는 기존 건축물과 달리, 바람의 세기에 따라 외벽부터 순차적으로 붕괴되도록 설계됐다. 피난처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지원을 받은 한국 건축가들의 재능기부로 탄생했다.
피난처 건설 현장에 서 있는 위진복(왼쪽)-박관주(오른쪽) 건축가
하이옌이 마을을 휩쓴 이듬해인 2014년 3월 위진복(유아이에이건축), 박관주(태아건축) 건축가는 조계종사회복지재단, 아시안 브릿지 등 구호단체와 함께 컨소시엄을 형성해 난민촌이 된 다랑가이 파고를 찾았다.
조계종사회복지재단은 까뜨몬 뚜굽 등 인근 12개 마을에 재난 복구에 필요한 각종 공구를 갖춘 보관소를 설치하고, 주민을 상대로 공구를 대여하는 사업을 펼쳤다. 또 다른 재난에 대비해, 재난 피해 경감 교육도 진행했다.
두 건축가는 좀 색다른 생각을 했다. “다시 태풍과 쓰나미가 몰아 칠 때, 정말 필요한 게 뭘까?” “좀 더 신속하고 손쉽게 견고한 피난처를 만들 수 없을까?”, “단순 복원을 뛰어 넘어 재난에 따른 환경과 마을공동체의 변화까지 고려할 수 없을까?” 이런 고민의 결과물이 바로 재난 피난처다. 일단 슈퍼태풍에 견딜 수 있는 내구성을 갖춘 역학구조로, 재난 상황에서 주민들이 좀 더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는 중간 피난처 구실을 한다. 평상시엔 마을 회관으로 쓰인다. 반면, 부품은 잘게 쪼갰다. 컨테이너로 어디든 운송할 수 있는 크기로 볼트를 이용해 레고블럭처럼 분해조립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콘크리트 기초를 다진 상태라면 단 하루만에 20평 규모의 건축물을 완성할 수 있다. 최초 설계와 부품 제작, 운송 등에 필요한 자금 부족, 크레인 등 조립장비 수배 등 난관이 겹치면서 시간이 많이 걸렸을 뿐, 실제 마을에 도착한 부품을 404개의 볼트로 조립하는 데는 단 이틀이 소요됐다.
한국 업체들도 두 건축가의 구상에 힘을 보탰다. 인천공항 구조물의 안전진단 및 구조계산 등에 참여한 ㈜동양구조안전기술이 각종 시물레이션을 통해 내구성과 신속한 조립이 가능한 최적의 건축물 설계를 도왔고, 신성건설이 철골 부품을 만들었다. 위진복 건축가는 “우리 건축가들이 해외를 겨냥해 재난 이후 자연 환경과 커뮤너티의 변화까지 고려해 분해조립이 가능한 건축물을 제작한 것은 처음”이라며 “이미 모듈화 돼, 재정만 지원되면 네팔 지진 피해 지역 등 다양한 재난에 적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첫 시도는 8000만원이 들었지만, 보편화 될 경우 더 저렴하고 신속하게 설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건축가들의 이런 시도가 나라 안팎에서 제대로 평가를 받는다면 더 활성화될 것이다. 해마다 2조원 규모의 해외구호개발사업비를 지출하는 정부가 한국의 대표적 구호활동 구조물로 선정하면 어떨까. 박관주 건축가는 “정부나 각종 모금단체에서 지원하는 해외구호사업 비용의 경우, 기본적으로 재난지역에서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하지만, 실제 재난이 닥친 피해 지역에선 펌프, 용접기 등 아주 기본적인 설비조차 조달하기 어렵습니다. 필리핀 재난 피난처 건설처럼 한국에서 관련 부품을 제작, 조달할 경우 구호사업비용을 국내에서 지출할 수 밖에 없는데, ‘왜 재난지역에서 사용하지 않느냐’는 지적을 받는다. 결국 이런 제약을 없애야, 좀 더 실질적인 재난 지역 지원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부의 해외구호개발사업비 집행 등을 손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필리핀에 처음 시도한 재난 피난처 모델을 유엔 주최로 올해 에콰도르에서 열리는 ‘하비타트회의’(세계인간정주회의)에도 선 뵐 예정이다. 환경과 주거의 문제를 다루는 국제회의를 통해 피난처 모델의 가능성을 인정받고 싶다는 기대가 담긴 것이다. 일본의 반 시게루는 전 세계 분쟁지역을 찾아 대나무 등 자연친화적 재료로 피난처 만든 공로로 지난해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상’을 받기도 했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