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구 신공덕동에서 25년째 자장면집 신성각을 운영하고 있는 이문길(49)씨가 직접 손으로 면을 만들고 있다. 강재훈 기자 khan@hani.co.kr
중국 산둥성의 엔타이에서 띄운 돛배는 자석에 이끌리듯 건너편 반도의 들머리, 인천항에 가닿는다. 산둥 출신 가난한 노동자들을 태운 배를 순풍이 떠밀면, 채 하루도 걸리지 않는다고 했다. 인천에서 가장 가까운 중국 영토인 탓이다.
인천 드림 =한국인이 여권보다 먼저 챙기는 고추장처럼, 그들 손에 쥐어져 있던 게 바로 밀가루와 콩을 섞어 발효시킨 춘장이다. 1883년 개항하면서 상하이 등의 큰 무역상이 드나들던 인천 부두에서, 짐을 나르는 꾸리(인부)가 된 그들을 달래준 것도 춘장. 붉은 춘장(醬-장)을 볶아(炸-작) 국수(麵-면) 위에 얹어 먹으며 추위를 버티고, 허기를 잊었다. 고향도 성큼 다가왔다. 바로 그 고향에서 밭일하다 참으로 옥수수빵이나 국수, 밭에서 바로 뽑은 대파에 도란도란 둘러앉아 비벼 먹고 발라 먹던, ‘차오장’(작장) 아니던가. 오늘도 우리가 전국 2만5천여 식당에서 만들어진, 700만 그릇 이상을 하루 동안 먹는다는 자장면의 효시다.
목욕과 이발 =고기, 양파를 넣고 볶은 한국식 자장면을 ‘공화춘’에서 팔았다. 인천 안에 형성된 차이나타운에 1905년 자리잡은 우리나라 최초의 중국 음식점이다. 인기가 적잖았다고 한다. 상술 좋은 화교들에 의해 ‘청요리’는 유일의 외식으로 자리한다. 중국인들이 우리 나라에 가져왔다는 세 개의 칼, 이른바 자장면 요리칼, 비단 제단용 가위, 이발 가위 가운데 자장면 칼이 단연 날카로웠다. “그땐 자장면 한 그릇 값이면 목욕하고, 이발하고도 돈이 남는다더라”라고 설명하는 임헌일(54·화교 3세)씨. 3대째 가업을 잇는,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중식당(53년 가량) 가운데 하나인 ‘신일반점’의 운영자다. 지금에 비추자면, 영락없는 호텔 자장면 값이다. 만원으로 시작된 100년의 한국식 자장면, 그 역사가 돛을 달고 한국의 근현대사와 만난 지점이다.
짜장면의 추억 =1960년 자장면 한 그릇은 15원. 화폐 가치가 다른 데다 빅맥과 아웃백에 길든 요즘 아이들로선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15원 자장면이야말로 빈곤한 시대를 건너게 하는 힘이었다. 자장면은 생일, 입학, 결혼을 축하해줬다. 모든 이별을 위무했음은 물론이다. “71년도쯤이었죠. 한 아버지가 어린 남매 둘을 데리고서 자장면을 시켰어요. 한참 먹더니 남매들을 붙들고 우는 거예요. 고아원에 맡기러 가던 길이었다더군요. 자장면에 소주 한 병을 들이킨 그 사람을 잊지 못합니다. 결국 돈도 안 받고 되레 차비까지 사장님이 줬었죠.” 1968년 <신흥관>(서울 필동)에서 처음 배달을 시작하며 중식업에 뛰어들었던 채근성(52·55년 된 마포 ‘현래장’의 지배인)씨가 전해준다. 71년께 처음 시판된 새우깡이 50원 했을 때도, 여전히 110원에 머물렀던 자장면은 가장 예리하고 뿌리깊은 기억의 표식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열에 아홉은 자장면을 주문했고, 그 가운데 또 여덟은 “곱빼기처럼 달라”고 주문했던 배 고픈 시절이었다.
짱꾸이의 추억 =1973년, 볶음밥은 당시 정부가 모든 중식당에 내린 ‘쌀밥판매금지령’을 기억한다. 이는 분식을 장려한다는 정부 계획과도 맞물리지만, 꾸준히 이어져온 화교 차별 정책의 연장이었다. “밀가루를 밥알처럼 떼어내 말린 다음 쪄서 볶음밥으로 만들었다”고 설명하는 수타 자장의 명인 손덕준(49·3대 째 중식업)씨. 당국은 68년부터 물가파동을 막는다며 자장면 값을 조금만이라도 임의로 올린 식당을 헤집었다. 수시로 들이닥친 위생, 세무 검열과 중과세 조치에 화교들은 지쳤고 멍들었다. 자장면이 세계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그들은 결국 멀리 떠나기 시작했다. 찌고 삶고 끓여 먹기만 했던 한국인을 볶은 기름의 맛으로 삽시간에 유혹해 60년대 3500곳까지 증가하며 번창하던 화교들의 중식당은 79년 1800곳으로 준다. 김명곤 국립극장 극장장은 “자장면을 먹을 때마다 슬픈 화교의 눈길이 생각난다”고 말한다. 대학생 시절, 함께 자장면에 소주를 마시던 후배로부터 “지독한 노랭이 짱꾸이(중식당 주인·흔히들 ‘짱께’라고 부른다) 놈아”란 말을 들었던 그 화교 주인의 눈길이. 자장면은 이 즈음 서민의 음식이 되었지만 면 가락을 뽑아준 ‘그들’은 서민의 이웃이 되지 못했다.
자장면의 추억 =언론이 보도용어를 ‘자장면’으로 통일(1994)했던 90년대는 자장면값이 처음으로 천원을 넘어선 때이기도 하다. 고급 패밀리레스토랑이 자장면의 모든 기능을 대신하면서도 “어머님은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어”라는 지오디의 노래가 감동을 전해주던 착종의 시대. 아프리카에서도 자장면을 먹을 수 있을 만큼, 풍요롭고 편리해졌다. 집단명사로서의 자장면이, 기호에 따라 해장용으로 또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만 즐기는, 개인적 보통명사로 ‘포스트모던’화한다. 그럴수록 짜장면과 짱궤이는 잊혀지는 망각의 시대가 되기도 하지만, 우린 자장면 없이 근현대를 성찰하기 어렵다. 방송 프로그램 <자장면의 사회학>(서울방송·2001)을 제작했던 윤동혁 대표(푸른별영상)는 “주민이 여든 명도 안되는 마라도에서 두 곳의 자장면 집이 자장면 한 그릇을 놓고 서로 싸우고 있는 걸 보고, 초등학생처럼 먹기를 기다렸던 그 곳의 자장면을 한 그릇도 먹을 수 없었다”고 회상한다. 자장면의 생존력은 여전히 강하다. 오는 7일부터 3일 동안 인천시 차이나타운에서 ‘자장면 100주년 대축제’가 열린다. 저마다의 자장면을 추억하는 계기가 될 법하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자장면 100년 오늘도 700만이 비빈다
1905년 지금의 자장면을 처음으로 만들어 팔았던 중국요리집 ‘공화춘’ 의 모습. 20여년전 문을 닫았다. 인천/ 김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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