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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단맛 대공습

등록 2005-10-12 22:11수정 2005-10-13 16:51

달콤한의 유혹 ‘웰빙’ 대명사 녹차마저 녹이고 시럽에 몸 담근 도넛도 젊은이 입맛 사로잡다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된 웰빙 시대, ‘잘 먹고 잘 살자’는 기치 아래 건강한 생활의 주적처럼 코너에 몰리던 단맛이 거센 힘으로 한국 젊은이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웰빙 적군 단맛의 ‘역습’은 대표적인 웰빙 음식인 녹차와 만나면서 올 여름부터 그 ‘포스’가 절정에 올랐다. 녹차 관련 음료와 케익 등을 파는 오설록을 비롯해 스타벅스같은 커피전문점에서 설탕을 첨가한 변형 녹차음료가 최고 인기상품으로 날개돋힌듯 팔린다. 홍차가 그 맛의 영역을 설탕과 나눠온 수백년 동안 고고하게 설탕의 유혹에서 벗어나있던 녹차가 설탕과 만나 혀끝을 달콤함으로 녹이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달콤함’을 벗어나 목을 타는 듯 강렬하게 단맛을 내는 도넛도 맹렬한 기세로 시장 점령에 나서고 있다. 지난 겨울 한국에 상륙한 ‘크리스피 크림 도넛츠’의 매장은 연일 단맛을 찾는 사람들로 긴 줄이 만들어져 단맛의 유혹과 입맞춤한 사람들의 애간장을 녹이고 있다.

설탕과 녹차, 400년만의 조우

가루녹차에 우유와 설탕시럽 등을 넣은 뒤 녹차라떼, 그린라떼, 그린티프라푸치노 등의 이름으로 팔리고 있는 변형 녹차음료들은 최근 20~30대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음료다. 스타벅스의 경우 ‘커피’전문점임에도 불구하고 40여종의 주력 음료 가운데 그린티프라푸치노가 차지하는 비율이 7%에 이른다.

특이한 점은, 당도는 대외비라지만 이 변형 녹차음료들의 맛이 상당히 달다는 것이다. 커피전문점에서 커피나 다른 음료을 사마실 경우 입맛에 맞게 설탕 시럽을 넣거나 뺄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커피전문점들이 녹차라떼류에는 미리 시럽을 듬뿍 넣은 채로 판매한다. 시럽을 추가해 더 달게 먹을 수는 있어도 안 달게 먹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린티프라푸치노를 판매하고 있는 스타벅스 관계자는 “얼음을 갈아만든 찬 음료에 단맛을 첨가하지 않으면 너무 싱겁게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밝혔지만 시럽을 뺀 냉커피나 냉녹차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이 변형 녹차음료는 1999년 한국에 들어온 스타벅스를 통해 한국 대중들과 만났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한국인의 입맛을 잡아당기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부터다. 지난 2004년 4월 처음 문을 연 태평양 오설록에서 판매하는 녹차라떼가 붐업을 주도했고, 그때부터 다른 커피전문점에서도 꾸준히 인지도를 높인 끝에 올 여름 드디어 가장 인기있는 음료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설탕의 세계사>를 보면 설탕과 차의 관계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17세기 후반 커피하우스를 드나들던 영국의 귀족 계급들이 홍차에 설탕을 넣기 시작했다. 당시 설탕과 차는 값비싼 약품이었고, 설탕을 넣은 홍차가 ‘신분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19세기 무렵 가격이 낮아지면서부터는 지친 노동자계급에게 반짝 기운을 불어넣는 흥분제로 널리 쓰였고, 제국주의와 함께 다른 나라에도 널리 퍼져나갔다.

홍차와의 조우를 시작으로 커피, 초콜릿은 물론 심지어 치약에까지 침범할 정도로 쓰임이 참으로 다재다능한 설탕이지만, 설탕이 미처 넘지 못했던 영역이 바로 녹차였다. 같은 잎에서 만들어진 홍차가 4세기 가까이 설탕과 달콤한 랑데뷰를 즐기는 동안, 녹차 특유의 깊고 떫은 맛은 도무지 설탕의 단맛과 만나지 않았으니, 녹차는 어쩌면 설탕이 점령하지 못한 최후의 고지였다. 하지만 올 여름 한국 젊은이들의 입맛을 강타한 변형 녹차음료들은 그 고지, 혹은 설탕에 맞선 최후의 보루 녹차마저도 가뿐히 점령했다.

너무 단, 끔찍한 맛의 유혹


일렬로 늘어선 하얀 도너츠 반죽이 펄펄 끓는 쇼트닝 속으로 총총총 밀려들어간다. 노릇노릇 튀겨진 이 도너츠들은 하얗고 끈적끈적한 시럽 속에 또 한번 풍덩 몸을 담근 뒤 고객들의 손에 쥐어지는데, 크리스피 크림 도너츠의 오리지널 글레이즈드다.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으로 이 도너츠를 집으면 위·아래 표면이 0.2mm쯤 주저앉는 게 느껴진다. 그 주저앉는 두께 만큼 묻어 있는 게 바로 도너츠들이 방금 전 잠수를 마치고 나온 시럽인데, 설탕과 물에다 식용 고착제만을 섞어 만든 순도 100% 설탕시럽이다. 설탕으로 칠갑한 도너츠를 입에 넣으면 일단 혀가 얼얼하고 곧이어 입천장이 벗겨지는 듯한 단맛이 느껴진다. 꿀꺽 삼킬 때 목구멍이 타는 듯한 느낌마저 드는 이 단맛은, 설탕 가루를 뿌리거나 설탕 시럽을 얹은 도너츠만 먹어 본 사람들이 미처 상상하기 힘든, 너무 단, 그야말로 끔찍한 단맛이다.

그 끔찍한 걸 누가 먹겠느냐 싶겠지만 천만에 말씀이다. 미국과 캐나다 등 전세계 360개 매장에서 22초 동안 팔려나가는 이 도너츠를 쌓아올리면 443m짜리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높이에 달한다는데,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해 12월 초 서울 신촌에 1호점이 생긴 이래 서울에 4개 매장이 생겼고, 현재 매장당 하루에 1만개 꼴로 팔려나가고 있다.

해외에서 이 도너츠를 맛본 유학파들이나 케이블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섹스 앤 더 시티> 같은 미국 드라마를 통해 그 단맛을 미리 접한 성질 급한 사람들은 매장 오픈 전 밤을 세워 줄을 서기도 한다. 이 업체 관계자는 “1호점 오픈 당시 새벽 5시부터 늘어선 줄이 매장 건물을 한 바퀴 두를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더욱 의외인 것은 1개당 칼로리가 200kcal인 이 도너츠를 찾는 고객 가운데 70% 이상이 다이어트에 가장 관심이 많은 20대 여성들이라는 점이다.

한국인들이 사랑한 단맛

설탕이 바다 건너온 감미료기 때문에 단맛은 한국인들의 전통 입맛이 아니라는 견해도 있지만 단맛 사랑에는 한국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꿀이 들어간 음식엔 약(藥)자를 붙여 약과, 약식처럼 부를 정도로 단맛을 선호했다. 그리고 18세기 양반가에서 양봉이 유행하면서부터 꿀은 아예 양반들의 생활필수품이 됐다. 귀했던 꿀을 대신한 단맛도 있는데 곡류를 약한 불에서 오래 고아 만든 조청이 그것이다. 조청을 더 오래 고아서 식힌 엿도 빼놓을 수 없다. 제조과정부터 은근하고 느긋하기 그지없는 이들 단맛이 바로 ‘은근과 끈기’를 강조하는 한국인들의 전통적인 단맛이다.


19세기 후반 일본과의 무역과 선교사들을 통해 국내에도 본격적으로 설탕이 들어왔다.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옛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는 “외국인 선교사들이 무악재 나무장사들에게 설탕 넣은 커피를 먹여 나무를 독점했고, 서울 명동 일본인촌의 화과자점에서 팔던 사탕이 소개된 뒤에는 ‘꿀보다 더 단 것은 진고개(명동) 사탕이라네’라는 노래가사가 등장할 정도로 설탕의 단맛은 한국인들에게 충격적인 것이었다”고 이해를 도왔다. 하지만 1950년께까지 한국인의 1인당 연간 설탕 소비량은 100g 미만(제일제당 40년사)이었다. 이후 제당공장이 설립된 뒤 급격히 설탕의 단맛이 한국인의 입맛을 장악해 나갔고, 2000년 한국인의 1인당 연간 설탕 섭취량은 21.4㎏(국제설탕기구 연감)에 달한다.

글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사진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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