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문화일반

뒤늦은 부고…천경자 죽음은 왜 감춰졌나

등록 2015-11-06 19:34수정 2015-11-10 15:42

천경자. 클레이 제작 김태권, 사진 이은경
천경자. 클레이 제작 김태권, 사진 이은경
[토요판] 커버스토리 / 거장 천경자의 삶과 죽음

끝없이 파도쳤던 삶, 기묘한 부고
20세기 미술거장 천경자의 뒤안길
▶ 꽃과 뱀, 여인의 화가 천경자 화백을 두고 시인 미당 서정주는 “새봄 되어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새 종달새 소리를 듣는 것 같은” 작가라고 했지요. 환상과 슬픔이 깔린 채색 그림과 수필, 그리고 스캔들로 일세를 풍미했던 그는 마지막 가는 길까지도 세간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왜 그의 죽음은 장례를 치른 한참 뒤에야 알려져야 했을까요? 24년 전의 <미인도> 진위작 논란은 왜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을까요? 파란만장한 고인의 가족사와 그림인생을 살펴보며 그 배경을 짚어봅니다.

‘내 슬픈 전설의 91페이지’는 뒤늦은 ‘부고’로 끝났다. 이역 땅 뉴욕에서 91살로 숨진 지 두달이 지나서야 고국에 맏딸의 제보로 전해진 미술거장 천경자 화백의 타계 소식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던졌다. 어찌 보면, 그의 기묘한 부고는 끝없이 파도 치는 삶을 살았던 거장의 인생에 가장 걸맞은 종막인지도 모른다. 화사한 원색의 색채와 꽃무리, 뱀, 개구리, 나비, 그리고 소녀 혹은 마녀 같은 여인상으로 대표되는 그의 대중적인 그림들은 두번의 결혼 실패와 동생의 죽음, 진위작 논란 등 무수한 개인사의 상처와 고통을 쟁여 넣으며 빚어낸 결실이었다. 살기 위해 그려야 했던 그림 인생의 고비고비마다 구설과 논란에 휩싸였던 거장의 일상은 고단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해방 뒤 고루한 원로 중심 한국 화단에 여성작가로 뛰어들어 파격적인 채색화 작업을 감행하면서 자유인의 삶을 고집했던 천 화백에게 관습과 편견, 오해와의 싸움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기도 했다. 물 좋고 산 좋은 전남 고흥에서 남도창을 듣고 야생화와 실뱀을 보고 자랐던 수줍은 소녀가 거장이 되기까지의 역정은 사랑에 속고 사랑에 우는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20세기 한국의 문화예술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격정적인 삶을 살았고 그 업보로 숱한 상처와 회한을 감내해야 했던 고인의 인생에서 시대의 벽에 맞섰던 여성 예술가의 슬픈 뒤안길을 만나게 된다.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클레이 제작 김태권, 사진 이은경

1950년대 홍익대 교수 시절의 천경자 화백. 당시 보기 드문 현대적 감각의 원피스 옷차림이다.  사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제공
1950년대 홍익대 교수 시절의 천경자 화백. 당시 보기 드문 현대적 감각의 원피스 옷차림이다. 사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제공

파란의 가족사와 미술계와의 투쟁, 별이 되어서도 고단하네

“아무리 바람이 몰아쳐도 깊은 향기를 내뿜는 들판의 야생화 같은 분이셨어요.”

지난달 30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뒤늦게 열린 천경자 화백의 추모식장에서 그의 둘째 딸 김정희(61·미국 몽고메리 칼리지 교수)씨는 생전의 어머니를 그렇게 떠올렸다. 어릴 적 천 화백이 ‘미도파’란 애칭을 붙여주며 애지중지 키웠던 김씨는 고인의 그림 곳곳에 자주 등장하는 소녀상의 모델이었다.

한국의 프리다 칼로(멕시코 화가)라고 일컬어지는 천경자 화백은 생전 “죽음은 인생 최후의 무대”라는 일본 원로작가 우메하라 류자부로의 경구를 마음에 떠올리곤 했다. 1986년 <일간스포츠>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마지막까지 일하면서 맡은 역을 멋지게 치러내고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철학과 생활자세를 갖고 싶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바람은 노년에 들이닥친 병마와 유족간의 갈등 와중에서 온전히 실현되진 못했다. 98년 미국 뉴욕에 사는 맏딸 이혜선(70·섬유공예가)씨의 손에 이끌려 뉴욕의 딸 집으로 영영 떠난 뒤 스케치와 드로잉을 계속했지만, 한국과는 연락을 완전히 끊으며 칩거 생활을 했고, 2003년 뇌출혈로 쓰러진 뒤에는 사실상 스스로 거동을 거의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 뒤 10여년 만에 맏딸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쓸쓸한 임종을 맞았다.

‘남미장’ 혜선과 ‘후닷닷’ 남훈
‘미도파’ 정희, ‘쫑쫑이’ 종우
천경자가 보물처럼 여기며 아꼈던
아버지 다른 남매들 왜 연락 끊고
어머니 부음조차 숨기게 됐을까

자신을 팽개친 두번째 남편
뱀띠 김상호에 대한 증오와
삶을 향한 독기로 완성해낸
뱀 35마리의 그림 ‘생태’가
작가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다

부친에게 저항해 도쿄 유학…귀국길에 파란

불꽃같은 삶을 살았지만, 그 후광이 드리운 그늘은 컸다. 평생 기가 드세다, 자기 작품 앞가림도 못한다는 편견과 오해에 시달렸던 여성 화가의 모진 숙명은 유족들도 그냥 놓아두지 않았다.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거장이었던 어머니가 두달 전 세상을 떠났는데도 맏딸 혜선씨는 모친의 죽음을 계속 숨기다 2주 전 일부 언론에 제보로 알렸다. 동생 김씨와 장남 이남훈(67·건축가)씨를 비롯한 다른 유족들은 최근까지 고인이 숨진 날짜도, 유골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김씨는 “98년 어머니가 미국으로 가신 이후 종종 언니 집에 가서 뵙곤 했다. 2003년과 2014년 쓰러지셨을 때는 병원에서 만났다. 올해 4월5일 언니 이씨의 뉴욕 자택을 찾아가 병상의 어머니를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는 다른 유족과 언니 사이에 연락이 전혀 되지 않았다”고 했다.

“어릴 적 머리도 땋아주고 곤충채집 숙제도 해주었던 다정한 언니였다”는 김씨의 회상처럼, 천 화백의 2남2녀 남매들은 장성하기 전까지 어머니와 단란한 삶을 살았다. 남도에서 가장 예쁘다는 뜻의 ‘남미장’으로 불렀던 혜선씨, ‘후닷닷’이란 애칭을 붙여준 맏아들 남훈씨, 아기를 어를 때 나는 소리를 붙여 ‘쫑쫑이’라고 불렀던 막내 김종우(작고)씨는 생전 천 화백이 그림과 더불어 생명처럼 가장 아꼈던 보물들이었다. 그랬던 그들이 왜 이렇게 연락을 단절하고 어머니의 부고도 알려주지 않는 사이가 된 것일까.

모질고 고단했던 천경자 화백의 삶만큼이나 기구한 자식들 사이의 갈등은 고인의 그림 인생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가족사를 더듬어봐야 짐작할 수 있다. 전남 고흥 시골에서 화가의 꿈을 품고 유학하고, 두 사내를 만나 사랑하고, 버림받고, 아버지가 다른 자녀들을 거느리고, 화업과 가계를 함께 이끌어나갔던 그의 가족사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63년 신문회관 전시 당시 천 화백의 모습. 사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제공
63년 신문회관 전시 당시 천 화백의 모습. 사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제공

고인은 1924년 늦가을 밤 전남 고흥에서 군 서기였으나 도박에 탐닉했던 아버지 천성욱과 서화에 뛰어났던 어머니 박운아의 맏딸로 태어났다. 1979년 펴내고 2006년 개정판을 낸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를 보면, 그가 태어난 곳은 하얀 오랑캐꽃이 애처롭게 핀 봉황산 자락에 있었다. ‘남도의 묘한 기후 때문인지 꽃도 많이 피고 미친놈, 미친년들이 많아 날 궂은 날이면 시부렁거리는 그들 소리가 동네길을 누벼 메아리쳐 귀에 아프게 들려왔’던 곳이었다. 수를 잘 놓고 묵화에도 능했던 예인 기질의 모친에게서 모유가 안 나와 연유나 사탕 넣은 미음을 먹었던 그에게 처음 눈에 비쳐온 풍경은 건넌뱅이 언니 등에 업혀 어느 집 사립문 속에 들어갈 때 시야를 온통 연분홍으로 덮어준 꽃나무였다고 한다.

‘옥자’란 이름을 붙여준 외할아버지 무릎에서 ‘심청가’, ‘춘향가’ 창을 듣고 자란 어릴 적부터 보는 감각과 그리는 재질이 있어 대청마루 벽에 여인상을 그릴 정도로 일찍부터 그는 그림에 관심이 깊었다. 보통학교 시절 그의 소질을 발견한 일본인 담임의 격려로 화가의 꿈을 품게 된다.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시절 시집을 보내려는 부친에게 저항하며 다듬잇돌 위에 앉아 울다가 웃다가 광인 시위를 하면서 일본 유학을 결행한다.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후배 박래현 등과 동문수학하게 된 그는 당시 선호하던 양화를 택하지 않고 자신의 취향대로 섬세한 채색화를 가르치는 일본화 고등과로 진학해 사실적인 데생법과 채색법을 익히게 된다. 방학 시절 고향에 가서 병중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그린 <조부>, <노부>로 42, 43년 조선총독부미술전람회에 잇따라 입선하며 화단에 본격적으로 데뷔했다. 비교적 순탄한 듯했던 그의 화가 인생은 44년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면서 파란에 휩싸이는 운명을 맞는다. 도쿄에서 귀국 교통편을 구해준 일본 유학생 이철식과 44년 결혼하면서 첫딸 혜선과 첫아들 남훈을 낳았지만, 극심한 성격 차이로 곧장 헤어져야 했던 것이다.

김상호에 대한 양가적 감정

뒤이어 그의 삶의 중반기까지 자신을 고뇌와 질곡에 몰아넣은 두번째 남자가 찾아온다. 전남 광주의 신문사 기자였던 김상호였다. 호걸 용모에 언변이 좋고 주위에 여인들이 많았던 그는 전남여고에서 미술교사로 재직중이던 천 화백이 학교에서 열었던 46년 첫 개인전 때 만나 단박에 여심을 사로잡았다. ‘목 타는 사막에서 감로수를 마신 듯한 기분’에 그와 열애하며 사실상 동거 생활에 들어갔고 아이까지 임신했지만, 그는 알고 보니 유부남이었다. 다른 여인들과의 염문을 몰고 다니는 한량이었다. 사실혼 관계에 들어간 뒤 수시로 폭언을 하고 변덕을 부리고 집에 들어오지 않는 그였지만, 아이까지 갖게 된 천 화백은 그를 한편으론 미워하면서도 사랑의 미련 때문에 마냥 헤어질 수 없었다. 그 뒤 한국전쟁이 터졌고 유일한 위안이었던 여동생 옥희마저 온몸에 퍼진 결핵으로 사경을 헤매자 절망에 젖은 그는 하루라도 사는 길은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광주 시내의 한 과붓집에 작업실을 꾸리고 역전 뱀집을 돌며 뱀을 스케치하기 시작한다. 어릴 적 집 사립문에 도사리던 능구렁이, 지붕에서 참새 새끼를 습격하느라 창공에 긴 몸뚱아리를 꿈틀거렸던 뱀의 역동적인 생명력이 자신의 구원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기묘한 상상이 일어난 것이다. 뱀무리에 섞여 들어가는 성난 독사를 골똘히 스케치하며 두루마리에 부지런히 옮겼다. 51년 3월 결국 동생이 숨지고 그는 자신을 팽개친 뱀띠 남편 김상호에 대한 증오의 감정과 살겠다는 독기를 부려 넣어 저 유명한 뱀 35마리의 그림 <생태>를 완성했다.

1951년 이 뱀 그림 <생태>를 처음 선보인 부산 국제구락부의 2회 개인전은 고달팠던 그의 작가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징그러운 뱀 그림을 그리는 여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인파가 밤 9시까지 전시장에 몰려왔다. 주머니에 뱀을 넣고 다닌다는 풍설도 돌았다. 혀를 날름거리는 35마리의 뱀이 똬리를 튼 덩어리를 통째로 보여주는 소재와 구도의 도발성에 화단에서는 혀를 내둘렀고 거장 김환기로부터 홍익대로 출강하라는 부탁이 왔다. 뒤이어 둘째 정희씨가 태어났다.

〈생태〉(1951년). 독사 35마리가 엉킨 이 그림은 당시 화단에 큰 충격을 던졌다. 사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제공
〈생태〉(1951년). 독사 35마리가 엉킨 이 그림은 당시 화단에 큰 충격을 던졌다. 사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제공
〈내가 죽은 뒤〉(1952년). 병원에서 사람 뼈를 구해 그린 이 작품은 지금 더욱 강렬한 의미로 다가온다. 사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제공
〈내가 죽은 뒤〉(1952년). 병원에서 사람 뼈를 구해 그린 이 작품은 지금 더욱 강렬한 의미로 다가온다. 사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제공

54년 홍익대 전임강사가 되어 서울 북촌에서 살림을 시작한 그는 본격적인 화단 활동을 시작했다. 명동 문화거리에서 당당하게 담배를 물고 막걸리를 기울이며 박인환, 이봉상, 한묵, 박고석 등의 예인들과도 교유를 했다. 55년 대한미협전 대통령상 수상작 <정>(靜)과 <결혼> 등 그의 화폭이 징글징글한 사실적 재현에서 좀더 환상적이면서 구슬픈 정서를 담은 소녀와 동물 그림으로 변화해갈 무렵 그사이 잊었던 남편 김상호가 다시 찾아와 온 가족이 서울 생활을 하게 됐다. 그사이 막내 쫑쫑이 종우가 태어났다. 나름 온가족이 모였지만, 남편 김상호는 본부인 외에도 다른 여인들과 외도를 일삼았다. 작가의 고향집까지 빼앗고는 잦은 잔소리와 폭언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말다툼을 벌였다고 천 화백은 회고했다. 가난하고 추운 집에서 ‘김상호 죽어라 죽어라’를 되뇌면서도 그는 남편이 떠나가지 않기만을 바랐다. 결국 70년대 초반 유럽 남태평양 기행을 다녀온 뒤 집 문제로 옥신각신하던 천 화백은 남편과 영영 이별한다. 이런 미움 섞인 감정과는 별개로 그는 자서전에서 자식들에겐 호랑이처럼 원색적인 사랑을 베풀었다고 쓰고 있다. 밤에 경기를 앓는 후닷닷, 쫑쫑이를 업고 서울시내 병원을 헤맸던 일과 딸들의 명문학교 입학에 큰 자부심을 느꼈다는 구절들도 종종 보인다.

고갱·로랑생·샤갈 등 화풍 수용
양화 넘나드는 독창적 채색화에
여성 특유의 정한을 풀어낸 그림
“왜색풍” 등 화단 폄하와 싸워
후기작은 낭만과 꿈에 무게 실려

큰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
1991년 미인도 진위작 논란서
비롯된 상처 탓이라는 분석과
점점 심화된 어머니의 치매가
부담감 가중시켰다는 추정도

거장 천경자의 삶과 작품세계는 이처럼 파란 많은 개인과 가족사의 흔적들을 그대로 색채와 상징적 도상으로 반영하고 있다. 특히 사실적 재현에 가까웠던 50~60년대 색채화 작품들은 일제강점기 일본화의 정교한 채색 기법 방식에서 벗어나 자신의 인생 체험과 정한에 바탕한 원색조의 색채감각으로 독창적인 화풍을 구축한다.

전통회화 석채 등의 채색 재료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개구리, 뱀, 벌레 등의 동물과 환상적인 소녀상의 이미지를 등장시켜 작가의 예민한 감정과 고독의 느낌을 강렬한 색감으로 우려냈다. 여기에 69년 유럽, 남태평양과 90년대까지 아프리카, 중남미, 미국 등지로 이어진 기행의 결과물들로 계속 작업한 이국적인 풍물 그림들은 독한 기운을 내뿜는 마녀 같은 이국적 여인상과 열대 동식물, 유명 영화배우, 연예인 등이 얽힌 새로운 도상을 내보였다. 다분히 삽화적 이미지를 짙게 풍기는 풍물 그림들은 후반기 천경자의 작품세계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됐고 화문기행 등의 수필, 기고글들과 함께 대중적인 열광을 불러왔다.

〈환〉(歡, 1962년)은 60년대 초반의 그의 환상적인 화풍을 대변하는 작품이다. 사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제공
〈환〉(歡, 1962년)은 60년대 초반의 그의 환상적인 화풍을 대변하는 작품이다. 사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제공
〈길례언니〉(1973년)는 유년기 고향 언니를 떠올리며 그렸다고 한다. 사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제공
〈길례언니〉(1973년)는 유년기 고향 언니를 떠올리며 그렸다고 한다. 사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제공
〈탱고가 흐르는 황혼〉(1978년)엔 담배를 문 이국적인 여인의 풍모가 담겨 있다. 사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제공
〈탱고가 흐르는 황혼〉(1978년)엔 담배를 문 이국적인 여인의 풍모가 담겨 있다. 사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제공

“큰딸 혜선씨가 어머니 금융재산 등 독점”

그러나 이는 91년의 <미인도> 위작 사건으로 표면화되듯 거장의 전설과 신화를 원하는 대중과 미술판의 잣대를 대는 전문가들 사이에 깊은 관점의 골을 파기도 했다. 그것은 다르게 말해 인간 천경자, 화가 천경자를 보는 인식의 간극이기도 했다. 미술평론가 최광진씨는 “그의 후기 작품들은 미술의 길을 질문하는 대신에 여성으로서 자신의 낭만과 꿈을 실현하는 쪽으로 나가면서 삽화적 성격이 강화되었다”고 평했다. 그는 채색화라면 곧 왜색으로 봤던 해방 이후 화단의 인식을 비집고 고갱, 로랑생, 샤갈 등의 화풍을 수용해 양화를 넘나드는 독창적인 채색화의 경지를 일구었다. 여성 특유의 정한을 작품에 누구보다도 핍진하게 풀어낸 그의 자전적인 이야기 그림은 뛰어난 글들과 어우러져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여전히 화단에서는 천경자 그림의 양식적 완성도와 미술사적 기여에 대해 과대평가됐다고 폄하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았다. 실제로 생전의 작가는 자서전에서 화단과의 갈등에 대해 이런 술회를 털어놓고 있다.

“내 화단 역정은 역시 인생 못지않게 풍상의 평행선을 이루고 있었다. 내 화단 호적은 분명히 동양화가로 되어 있다. 해방되자 내가 좋아하는 색채를 다룬다고 해서 일본화가 무엇인지 한국화가 무엇인지 분별조차 못하던 당시 일부 동양화단에서 때마침 정치적으로 민족반역자 친일파 몰아치던 시류에 맞춰 내 작품도 무조건 일본화라고 몰아붙인 것이다. 싹트기 시작한 내 예술 사상을 구둣발로 무참히 문질러댔다. 그것을 보고 놀란 약삭빠른 색채화가들은 모조리 수묵화 대열에 끼었지만 나는 계속 좋아하는 색채화를 그렸다. 그러면서 때때로는 세계가 더 넓은 오일칼라로 바꿔볼까 하는 유혹에 견디느라 몸부림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등록상표처럼 부각된 뱀 그림을 세상에 대한 저항이라고 생전에 말한 바 있다. 말년까지 끊임없이 화폭에 등장한 뱀처럼 그의 화가 인생은 여성 작가의 지난한 몸부림을 몰라주고 오해하고 곡해했던 세상과의 끝없는 싸움과 대결의 산물이었다. 화풍과 연애, 결혼, 친구, 대중, 화랑 등 자신의 개인사와 미술에 얽힌 관계들에 대한 뿌리 깊은 피해의식과 두려움은 대담한 소재와 구도로 도발을 거듭한 여걸의 결기와 항상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려 있었다. 그의 곡절 많은 부음이나 유족들의 갈등도 이런 화풍을 둘러싼 간극과 뒤이은 진위작 파문의 그늘에서 빚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천 화백이 모친을 1986년 타계 때까지 끝까지 모셨듯, 미국에서 공예를 수학한 비슷한 성격의 큰딸 혜선씨도 98년 천 화백의 도미 이후 그를 지극정성으로 수발했던 것은 동생 등의 다른 유족들도 모두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가족들간의 관계는 정반대로 풀려나갔다.

유족과 주위에서는 97년 천 화백이 미국의 혜선씨 집으로 떠나기 전까지는 천 화백과 자식들 사이에 서로 종종 연락하면서 원만하게 지냈다고 전해진다. 당시 천 화백은 서울 강남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었는데, 맏딸 이씨가 97년 모친의 건강을 걱정해 모든 재산관리를 떠맡겠다며 미국 집으로 데리고 간 것이 관계가 틀어지는 분기점이 됐다는 게 정설이다. 이에 대해 김씨는 지난달 27일 회견 뒤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언니는 어머니처럼 성격이 무척 강하다. 어머니가 미국에 가시기 전에는 격하게 충돌해 말을 안 할 때도 있었지만, 미국에서는 십년여 동안 자신을 희생하며 어머니를 극진히 돌봐왔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어머니를 홀로 모시고 갈 때 다른 가족들이 전적으로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언니는 미국으로 떠날 때 이미 어머니의 금융재산 등 전권을 독점한 상태였다.” 점점 심화된 고인의 치매 증세가 외부에 공개하기를 꺼리는 맏딸의 부담감을 더욱 가중시키고 사태를 꼬이게 한 원인이라는 추정도 있다. 고인의 제자였던 화가 이화자(72)씨는 이런 증언을 했다.

“2002년 미국 뉴욕 한국영사관에서 우연히 딸 혜선씨와 함께 나온 선생님을 만났다. 내가 선생님이 홍익대 교수로 있던 60년대 중반 애제자였는데 인사를 드려도 알아보질 못하시고 ‘안녕하십니까’라고 하시는 거였다. 가슴이 찢어졌다. 혜선씨가 노인성 치매 증세라고 말했다. 지인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치매 증세를 보이는 분을 따님이 결코 외부에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조선미술전람회 입선작이자 그의 화단 데뷔작인 〈조부〉(1942년). 사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제공
조선미술전람회 입선작이자 그의 화단 데뷔작인 〈조부〉(1942년). 사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제공
대한미협전 대통령상 수상작인 〈정〉(靜·1955년). 사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제공
대한미협전 대통령상 수상작인 〈정〉(靜·1955년). 사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제공
똬리튼 뱀 그림이 인상적인 1963년 천 화백의 신문회관 개인전 팸플릿 표지.
똬리튼 뱀 그림이 인상적인 1963년 천 화백의 신문회관 개인전 팸플릿 표지.

당사자인 혜선씨도 최근 <동아일보> 미국 현지 인터뷰에서 “처절한 모습으로 병석에 누워 있는 엄마가 누굴 만나겠느냐. 어머니가 ‘내가 아플 때는 누구도 들이지 마라’고 하셨다”면서 모친을 내보이는 것이 사생활 침해라고 보는 시각을 드러냈다. 그렇다고 해도 동생들에게까지 어머니의 죽음을 숨기고 유골 봉안처까지 알리지 않은 이유는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딸 혜선씨가 고인의 부고를 놓고 벌이는 이해할 수 없는 기행의 뿌리에 관해, 미술계에서는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의 <미인도> 진위작 논란에서 비롯된 정신적 상처 탓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작품이 가짜라는 작가의 판단이 진작이라는 미술관과 화랑, 전문가들의 감정 앞에 무시되는 상황이 작가에게 막대한 심리적 타격을 주었고, 유족에게도 극도의 피해의식으로 번졌다는 추측이다. 지난해 예술원이 회원인 천 화백의 생사를 입증하는 의료 증빙서류를 제출하라고 요구하자 혜선씨가 명예훼손이라고 반발하면서 제출을 거부하고 가족을 제외한 국내 미술계 인사 누구에게도 뉴욕의 모친을 공개하지 않았던 것은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둘째 아들이 찍어놓은 슬라이드

미술계에서 작고한 거장들의 유족은 시장이나 미술관 구입품의 작품 진위 판정이나 기증품 등의 관리 등에서 가장 우선적인 발언권을 갖는 것이 보통이다. 혜선씨는 그동안 서울시립미술관의 천경자 기증실의 컬렉션 관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모친의 고향인 전남 고흥군에 드로잉 기증품을 중심으로 세우려던 미술관 건립 계획을 운영조건이 맞지 않는다고 백지화시키는 등 고인의 작품 기증과 후속사업에 대해 적극적으로 관여해왔다. 그러나 고인의 타계를 계기로 이런 양상이 바뀔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혜선씨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대외적으로 내기 시작한 다른 유족들도 고인의 사후 작품 관리를 놓고 개입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이다. 유족들에 따르면, 작고한 둘째 아들 종우씨는 생전 어머니 곁에서 작품 활동을 일일이 지켜보면서 그의 작품과 관련된 방대한 분량의 슬라이드 사진 자료 카탈로그를 만들었다고 한다. 작은딸 정희씨는 “작품 관리를 주도하려는 의향은 없지만, (우리가) 어머니의 모든 작품에 대한 사진 자료들을 갖고 있어서 진위작 판정이나 기증작 관리 등에 도움이 될 수는 있을 것”이란 입장을 밝혔다.

1951년 부산 국제구락부에서 열린 천 화백의 2회 개인전 팸플릿. 대표작 ‘생태’가 출품되며 그의 존재를 널리 알린 기념비적인 전시회였다. 표지에 실린 당시 27살 작가의 사진에는 비장한 기운과 결기가 감돈다.
1951년 부산 국제구락부에서 열린 천 화백의 2회 개인전 팸플릿. 대표작 ‘생태’가 출품되며 그의 존재를 널리 알린 기념비적인 전시회였다. 표지에 실린 당시 27살 작가의 사진에는 비장한 기운과 결기가 감돈다.
생전 천 화백은 자기를 아끼고 초연히 살고자 해도 인생살이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별을 쳐다본다고 술회하곤 했다. “옛날에 맺히게 가슴이 아플 때면 밤을 기다려 별을 쳐다보면 세례를 받는 기분이었다. 저 반짝이는 별 속에 인자하고 선한 영혼이 있어, 보이지 않는 모습이지만 초음속으로 가깝게 다가와 고민을 씻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직 별이라도 믿어야 살 것 같다.”(<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418~419쪽). 이제 하늘의 별이 된 그는 지상의 후손들을 어떤 눈길로 바라보고 있을까.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및 도판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제공

▶관련기사: 미인도 위작 논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