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낙청과 ‘창비’의 50년
1966년 창간…비판적 시대정신 이끌어
1990년대부터 국제무대로 영역 넓혀
1966년 창간…비판적 시대정신 이끌어
1990년대부터 국제무대로 영역 넓혀
계간 <창작과 비평>은 1965년 등록해 이듬해인 66년 창간호를 발행했다. 서울 공평동의 한 다방 옆 작은 출판사에서 이름을 빌려 간행되었지만 비판적 시대정신과 지식인의 기개를 선보여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미국 유학에서 막 돌아온 백낙청 서울대 교수는 창간호 권두평론으로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를 발표했다.
출판사 창작과비평사는 74년 1월 설립했다. 같은 해 황석영 소설집 <객지>,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백낙청·염무웅 공역), 리영희 평론선 <전환시대의 논리> 같은 굵직한 책들을 펴냈다. 75년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면서 잡지가 회수되었고 <신동엽전집> 또한 판매금지를 당했다. 77년 리영희 한양대 교수와 백낙청 교수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연행됐다가 리 교수는 구속되었고, 백 교수는 불구속 기소되었다.
80년대는 뜨거웠다. 군부독재 아래 잡지 폐간, 출판사 등록 취소 등의 고난을 당한 창비는 파란만장했던 한국 현대사의 증인이 됐다. 80년 <창작과 비평> 봄호에서 특집 ‘80년대를 위한 점검’ 좌담(서남동·송건호·강만길·백낙청)을 마련했지만 계엄사 검열단이 전문을 삭제해 발행했다. 양성우 시집 <북 치는 앉은뱅이>, <신동엽전집>(증보판)이 판매금지되었다. 7월말 잡지가 강제 폐간되었고 82년 김지하 시선집 <타는 목마름으로>가 판매금지, 압수되었다.
85년 10월 부정기간행물 1호로 나온 <창작과 비평>에는 집중기획 ‘한국자본주의 논쟁 1’(박현채·이대근)이 실렸다. 이를 계기로 한국 사회 성격을 둘러싼 ‘사회구성체 논쟁’이 뜨겁게 이어졌다. 그해 12월 출판사 등록이 취소되었고, 시민단체와 지식인을 비롯해 2853명의 이름을 담은 서명록이 문화공보부에 전달되는 등 항의운동과 서명이 잇따랐다.
계간지 <창작과 비평>이 복간된 것은 88년. 통권 59호였다. 이듬해 겨울호에는 황석영의 북한 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게재해, 이시영 주간 등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다.
90년대 이후 창비는 여러 문학적 시도와 ‘전지구-지역적’ 담론을 펼친다. 98년 여름호 통권 100호 기념 학술토론회로 ‘아이엠에프(IMF) 시대 우리의 과제와 세기말의 문명전환’을 개최하기도 했다. 2006년 6월 창간 40주년 기념 동아시아 국제심포지엄을 연 뒤에는 한·중·일 등 동아시아 지역의 진보적 성향을 가진 잡지들과 함께 ‘동아시아 비판적 잡지 회의’를 결성해 교류를 이어오고 있다.
창비 50년 역사의 중심에 선 편집인 백낙청 교수는 한국 사회를 분석하고 변화를 이끌어온 실천적 지식인으로 평가받는다. 그와 창비가 내놓은 분단체제론, 87년체제론, 이중과제론, 민족문학론, 동아시아론, 세계문학론은 모두 한국 사회의 문제를 고민하고 해법을 모색해왔다.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는 백 교수의 역할에 대해 “분단체제를 세계체제의 틀에서 접근하여 사상·이론 차원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했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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