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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검열에 침묵, 감투엔 민감…2015년 한국미술 ‘우울한 초상’

등록 2015-12-29 20:41

울림과 스밈
한국 미술판은 올해 내내 ‘2류 정치’에 끌려다녔다. 담론, 이슈 제기는 뒷전이었다. 미술인들은 감투 다툼에는 기민하게 움직였고, 관이 주동한 검열 등에는 침묵했다. 연줄과 안면 얽힌 이들끼리 허물을 대충 덮고 가는 모순된 행태들이 도드라졌다.

외국인 관장 선임까지 1년여를 끈 국립현대미술관장 공모 잡음부터 심상치 않았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올봄 관장을 공모하자 서울대, 홍대 출신 중견 미술인들은 자기 대학 출신을 앉히려고 투서를 돌리는 등 치열한 물밑 암투를 벌였다. 암투가 과열되자 김종덕 문체부 장관은 6월 서울대 출신 최효준 전 경기도미술관장이 최종 후보로 오른 상황에서 ‘적격자가 없다’며 전례없는 재공모 방침을 밝혔다.

그 뒤 재공모 과정에서 미술인들이 보인 행태들도 ‘하수의 정치’를 벗어나지 못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미술관장 시절 국왕을 풍자한 출품작 전시 철회를 압박하다 검열 의혹으로 사퇴한 기획자 바르토메우 마리가 유력한 후보라는 풍문이 10월 흘러나오자 작가와 기획자들은 이례적으로 800여명이 서명한 ‘국선즈’(국립현대미술관장 선임에 즈음한 우리의 입장)란 연대모임을 꾸려 검열 의혹 해명을 요구했다.

6월 문체부가 미술관 운영 규정을 고쳐 관장 인사권과 작품 수집 권한 등을 축소시킨 것도 관료적 전횡이라며 함께 문제삼았다. 문체부의 관장 권한 축소는 9월 국회 국정감사에서 처음 지적된 내용으로, 정영민 전임 관장의 서울대 인맥 편중 인사에 따른 운영 파행을 구실로 규정이 개정된 지 넉달이 지나 외국인 관장 선임이 유력해지자 뒤늦게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마리 관장 선임은 김 장관이 7월 외국인에게 공모를 개방할 때부터 구상한 치밀한 기획이었다. 장관은 외국인 관장에 대한 국내 미술계의 거부감을 “3급 국장 자리인데 민감하게 반응한다” “세계 미술계 변화를 외면한 단견”으로 치부했다. 문체부도 국선즈의 의혹 해명 요구에 응답도 하지 않은 채 선임을 밀어붙였다. 언론에 먼저 마리의 관장 후보 선임 사실을 문체부 관계자가 확인해주거나, 마리 취임을 지지하는 서구 미술인들 서명이 진행되는 이상한 상황도 벌어졌지만, 국선즈는 성명과 토론회, 산발적인 1인시위 외엔 강력한 행동을 보여주지 못했다.

국선즈의 검열 반대 주장은 잣대가 이중적이었다. 앞서 9월 작품 장터를 벌인 서울시립미술관이 초대작가 홍성담씨의 그림을 두고 ‘반미 테러를 부추긴다’는 보수언론의 마녀사냥식 보도가 나오자 일방적으로 작품을 철거한 검열 파문이 있었다. 그러나 국선즈는 이 사태를 쟁점으로 거론하지 않았다. 성명을 주동한 일부 미술인들과 서울시립미술관의 각별한 관계가 배경이란 설들이 돌았다. “장터 기획자 홍경한씨를 만난 적도 없다. 김홍희 관장의 사과도 없다. 끔찍하다”는 홍 작가의 절규를 그들은 알고 있을까. 국내 미술관 검열에는 한마디도 못하고 새 외국인 관장에게 검열 않겠다는 윤리선언을 촉구하는 국선즈의 발언은 공허하다.

예술의 이름으로 대안을 제시하려는 시도들은 지지부진했다. 연초 젊은 미술인들이 꺼낸 국립현대미술관 청년관 신설론은 미술판에서 외면당했다. 40~60대 작가들도 작업을 지속할지가 불투명한 시대 상황에서 청년관 주장은 ‘투정’으로 받아들여졌다. 젊은 작가들이 관의 지원 아래 10월 벌인 직거래 장터 ‘굿즈’가 반짝하고 사라진 데서 보이듯, 전위성 잃은 청년 미술인들의 우유부단하고 불투명한 정체성이 난립한 신생공간들의 돌출적 전시들로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단색조 그림들의 열기로 들떴던 화랑업자들도 올해 타계한 천경자 화백을 둘러싼 <미인도> 위작 논란과 이우환 작가의 위작 논란에는 입을 닫고 몸을 사리기만 했다.

노형석 기자
노형석 기자
지도자의 무능과 독선이 세상을 어지럽혔던 올해 회자된 철학자 플라톤의 금언이 있다.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자기보다 못한 저질스런 자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라는 <국가>의 한 구절이다. 패거리 의식에 빠져 관의 노회한 미술정치에 허둥거렸던 미술인들이 새해 더욱 새겨야 할 경구가 아닐까.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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