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류굴 석벽 명문에서 새로 판독된 핵심 글귀인 ‘대식식(大息食: 크게 쉬고 먹었다)’을 확대한 모습(왼쪽)과 성류굴 입구 석벽에 새긴 신라 명문의 전체 모습(오른쪽). 확대된 글자들 사진에 ‘大’ ‘息’ ‘食’ 세 글자의 윤곽이 뚜렷이 보인다. 석진화 작가, 울진군 제공
금석문 추가판독 결과 드러나
국민관광지로 손꼽히는 경북 울진 성류굴이 1500여년 전 신라인들도 즐겨찾던 최고의 휴양지였음이 드러났다. 신라인들이 자신들의 관광 휴양을 암벽에 새김글씨로 기록한 타임캡슐이 열린 것이다.
금석문 전문가들이 최근 옛 신라인들의 글자 기록들이 발견된 울진 성류굴 들머리 석벽의 암각글자를 26, 27일 추가 판독한 결과 획기적인 사실을 밝혀냈다. 신라시대 울진 지역 59촌의 마을 사람들이 지방관리인 대나마의 인솔 아래 크게 먹고 쉬었다는 내용이 추가로 나타났다. 국내에서 관광 휴양 문화에 관한 가장 이른 시기 기록일 뿐 아니라 성류굴 자체에 대해서도 가장 오랜 기록이어서 학계의 관심이 쏠릴 것으로 보인다.
이런 내용을 밝혀낸 이는 고신라 금석학 전문가인 이영호 경북대 교수와 이용현 국립대구박물관 학예사, 심현용 울진군 학예연구사다. 이들은 26, 27일 성류굴을 찾아가 발견된 신라 글자를 추가로 정밀 조사한 끝에 새로운 판독 결과를 얻어냈다. 이번 2차 판독 내용은 ‘계해년 3월8일(癸亥年三月八日) 굴의 관리자(굴주)인 대나마(大奈麻: 신라 17관등 중 10번째의 관리 직급)가…이 산(此山)을 찾아 20일 59촌의 사람들과 크게 쉬고 먹었다(五十九村□人大息食)’는 내용으로 요약된다. 명문의 글씨가 6세기 초 신라 법흥왕 때 새겨진 울산 천전리 각석에 나오는 계해년 글자와 거의 똑같고 다른 글자들도 천전리 각석, 88년 울진에서 발견된 신라 봉평비의 글자와 서풍이 비슷해 계해년은 543년일 가능성이 크다는 추정이다. ‘대나마’의 관등명이 울진 봉평리 신라비와 동일한 글자로 돼 있는 점, 간지(干支)로 글이 시작된 사실 등도 계해년을 543년으로 추정하는 근거다. 발견 직후 1차 판독 결과 ‘신라 진흥왕 4년 3월8일 대나마가 굴에 왔다 남긴 글’이라고 해석한 부분에서 훨씬 진전된 내용이다.
이영호 경북대 교수 등 3명
26~27일 들머리 암벽 정밀조사
543년 추정 근거 더 확실해져
신라인 유람기록 담은 금석문 중
구체적인 행적 적힌 첫 사례 신라인들의 유람 기록을 담은 기존 금석문으로는 6세기 초 법흥왕 때 신라 귀족들이 유람 왔다는 사실을 기록한 울산 천전리 각석과 제천 점말 동굴에 당시 예부 관료들이 기록한 6~7세기 무렵 인명 기록 등이 있다. 기존 금석문들은 놀러 온 일행의 이름을 약술한 것으로, 구체적으로 먹고 쉬면서 휴양했다는 행적을 새긴 것은 성류굴 암각문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고신라 시대 행정단위인 촌의 숫자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이 학예사는 “아직 판독이 제대로 안 됐지만, 무당, 할미를 뜻하는 ‘姑’(고) 자 비슷한 글자도 보인다. 정밀한 판독이 진행되면 당시 울진 지역 신라인들의 동굴 휴양과 제례 등에 관한 구체적 정보가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성류굴의 암각 명문은 이달 6일 고고학자인 박홍국 위덕대 박물관장이 가족여행을 왔다가 우연히 발견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성류굴 들머리 위쪽의 석회암 석벽에 세로 7행으로 38자가 새겨져 있다. 해서체로, 각각 가로 3㎝, 세로 4㎝ 정도의 크기인데, 바로 옆에 새긴 조선시대 지방관료들의 이름 명문 부근에도 희미한 고신라 글자 흔적들이 보여 종합적인 조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성류굴은 석회암이 녹아 흘러내린 종유석, 석순 등이 들어찬 기묘한 경관으로 유명하다. <삼국유사>에 장천굴이란 지명으로 처음 문헌에 등장한다. 통일신라 시대 보천태자가 굴에서 수도하면서 다라니경을 염송해 굴신이 감복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 말의 학자 이곡이 성류굴의 내부 명승에 대하여 언급한 <관동유기>(關東遊記)는 이 땅 최초의 동굴탐사기로 꼽히고 있다. 16세기 임진왜란 때는 동굴 안으로 백성 500여명이 피난을 했으나, 왜군들이 입구를 막는 바람에 굶어 숨졌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글자를 판독한 이영호 교수는 내년 1월16일 한국목간학회 발표회에서 성류굴 암각문의 추가 판독 결과를 공식보고할 예정이다. 울진/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26일 굴 석벽에 새겨진 고신라 글자들을 이영호 경북대 교수(오른쪽)와 이용현 국립대구박물관 학예사가 판독하고 있다. 사진 노형석 기자
26~27일 들머리 암벽 정밀조사
543년 추정 근거 더 확실해져
신라인 유람기록 담은 금석문 중
구체적인 행적 적힌 첫 사례 신라인들의 유람 기록을 담은 기존 금석문으로는 6세기 초 법흥왕 때 신라 귀족들이 유람 왔다는 사실을 기록한 울산 천전리 각석과 제천 점말 동굴에 당시 예부 관료들이 기록한 6~7세기 무렵 인명 기록 등이 있다. 기존 금석문들은 놀러 온 일행의 이름을 약술한 것으로, 구체적으로 먹고 쉬면서 휴양했다는 행적을 새긴 것은 성류굴 암각문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고신라 시대 행정단위인 촌의 숫자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이 학예사는 “아직 판독이 제대로 안 됐지만, 무당, 할미를 뜻하는 ‘姑’(고) 자 비슷한 글자도 보인다. 정밀한 판독이 진행되면 당시 울진 지역 신라인들의 동굴 휴양과 제례 등에 관한 구체적 정보가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성류굴의 암각 명문은 이달 6일 고고학자인 박홍국 위덕대 박물관장이 가족여행을 왔다가 우연히 발견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성류굴 들머리 위쪽의 석회암 석벽에 세로 7행으로 38자가 새겨져 있다. 해서체로, 각각 가로 3㎝, 세로 4㎝ 정도의 크기인데, 바로 옆에 새긴 조선시대 지방관료들의 이름 명문 부근에도 희미한 고신라 글자 흔적들이 보여 종합적인 조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성류굴은 석회암이 녹아 흘러내린 종유석, 석순 등이 들어찬 기묘한 경관으로 유명하다. <삼국유사>에 장천굴이란 지명으로 처음 문헌에 등장한다. 통일신라 시대 보천태자가 굴에서 수도하면서 다라니경을 염송해 굴신이 감복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 말의 학자 이곡이 성류굴의 내부 명승에 대하여 언급한 <관동유기>(關東遊記)는 이 땅 최초의 동굴탐사기로 꼽히고 있다. 16세기 임진왜란 때는 동굴 안으로 백성 500여명이 피난을 했으나, 왜군들이 입구를 막는 바람에 굶어 숨졌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글자를 판독한 이영호 교수는 내년 1월16일 한국목간학회 발표회에서 성류굴 암각문의 추가 판독 결과를 공식보고할 예정이다. 울진/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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