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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후세 물려줄 월성 유적에 죄지을까 두렵다”

등록 2016-01-03 20:31

경주는 지금 복원의 ‘난장판’
한겨울에 발굴을 시작한 월성 해자 유적의 모습. 얕게 판 발굴갱과 수레, 괭이 등의 발굴도구들이 흩어져 있다.
한겨울에 발굴을 시작한 월성 해자 유적의 모습. 얕게 판 발굴갱과 수레, 괭이 등의 발굴도구들이 흩어져 있다.
쇼쇼쇼 경주? 지난해와 올해 문화재 전문가들 사이에서 흉흉하게 떠돌아다녔던 말이다. 경주시와 문화재청이 박근혜 정부의 전폭적 지원아래 대통령 공약을 앞세워 천년 신라 궁터인 월성과 거찰 황룡사터를 불과 10여년만에 조사, 복원하는 속전속결식 문화재 사업을 강행하고 있다. 고도를 되레 훼손, 파괴할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6만평이 넘는 광대한 월성 궁터 발굴은 최소한 20~30년 걸린다는 게 국내 고고학계의 기본 상식이지만, 시쪽은 2020~2025년 월성 궁궐 복원을 마무리하고 2035년까지 황룡사 금당·목탑, 월지(안압지)와 동궁터 건물, 쪽샘유적, 대형 고분공원 등 8대 경주유적을 최종 복원·정비하겠다는 목표를 거리낌 없이 밀어붙이는 중이다. 고증은 물론 복원 뒤 운영방향에 대한 면밀한 논의도 없다. 복원지상주의를 외치면서 발굴부터 빨리 진행하라고 문화재청과 지자체가 조사진을 연일 압박한다. 연말에도 강행되는 발굴과 복원 준비로 부산한 경주 문화유산 현장을 살펴봤다.

‘대통령 공약’ 박근혜 정부 전폭지원
작년 4월부터 신라궁터 C지구 발굴중
문화재청·지자체 압박속 ‘숨가쁜 속도전’
땅 어는 한겨울 상식 깨고 작업 강행
“면밀한 조사 못해 큰 부작용 올수도”
학계 우려에도 되레 발굴 영역 확대
시청 관계자 “정권 바뀌기 전 성과 내야”

경주시에서 만든 신라왕경 복원 모형. 내년에만 647억원 예산을 들여 월성 해자 문루 복원 등의 사업을 벌일 계획이다.
경주시에서 만든 신라왕경 복원 모형. 내년에만 647억원 예산을 들여 월성 해자 문루 복원 등의 사업을 벌일 계획이다.
지난 30일 오전 신라 천년 궁터인 경주시 인왕동 월성 내부. 유적 한가운데인 C지구 1만여평 터에서 어르신 인부들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조사원들이 꽃삽과 괭이를 들고 지표를 조금씩 파내는 발굴 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최근 드러난 원형 수혈 유적에 대한 조사였다. 찬바람이 휭휭 부는 한겨울에는 땅이 얼어붙거나 경직돼 작업을 쉬는 게 기본이다. 하지만, 조사원들은 다급한 표정으로 쉴 새 없이 작업을 독려하느라 바빴다. “한달 사이 비가 많이 내려 작업을 제대로 못했다. 발굴 영역이 계속 확대중이고, 내년까지는 시 지구 상층부 발굴을 가시적으로 마무리해야해서 발굴을 쉬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는게 이종훈 학예연구사의 말이었다.

2014년 12월11일 시굴을 시작해 지난해 연초에도 강행군을 거듭하며, 4월 본격 발굴로 전환한 월성 조사는 숨가쁜 속도전으로 진행돼왔다. 궁터 핵심으로 꼽히는 C지구에서는 지표만 걷어냈는데도 6동이상의 건물터와 원형 연못 추정 수혈터, 담장터가 드러났다. 기와와 토기조각들도 벌써 수만여점이 나왔다. 정상적인 대형유적 발굴이라면, 귀퉁이부터 파면서 지층과 유적 유물들의 관계를 세세히 파악하며 조사를 진행해야 한다. 게다가 월성은 2~10세기 다기한 신라 궁궐의 건물, 시설터들이 시대별로 지층을 달리해 켜켜이 쌓여있는 매우 복잡한 유적이다. 그러나, 경주시와 문화재청은 지난 9월 박 대통령이 월성 현장을 시찰하며 가시적 성과를 지시한 뒤로 성 남쪽 에이(A)지구의 문터, 문루와 성바깥 방어용 연못인 해자까지 발굴 영역을 확대했다. 연구관 1명에 연구사 8명이던 연구소 조직에 연구관 1명과 전문계약직 조사원 5명이 충원됐지만, 2만평의 면적을 감당하기에는 한참 벅차다. 여기에 문화재청과 지자체, 국회의원들로부터 발굴 상황을 묻는 전화와 면담 요구가 하루가 멀다하고 날아온다. 한 연구사는 “애초 문화재청은 A지구 전체를 시지구와 같이 발굴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11월 문화재위원회에서 무리한 발굴이라고 부결시켜 해자와 에이지구의 문루 쪽만 조사하는 것으로 정리됐다. 사실 지금 일감만으로도 제대로 유적 실체를 확인하면서 조사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고 털어놨다.

지난 12월30일 낮 경주 월성 안 C지구 발굴현장. 한겨울인데도 조사원과 어르신 인부들이 대거 나와 발굴작업을 강행하고 있다.
지난 12월30일 낮 경주 월성 안 C지구 발굴현장. 한겨울인데도 조사원과 어르신 인부들이 대거 나와 발굴작업을 강행하고 있다.
경주시 쪽 분위기는 전혀 딴판이다. 연말 보도자료를 돌려 내년중 월성 에이지구의 남쪽 문루 복원 설계를 시작하며 해자도 올 연말 복원해 물을 채울 계획이라고 알렸다. 2014년 4월 출범한 문화재청·경북도와의 통합조직인 신라왕경복원 추진단은 물론 연구소와 세부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발표한 내용이다. 현장을 돌아본 학계 한 연구자는 혀를 찼다. “성곽 남문루나 해자는 이제 발굴준비 중인데, 시 공무원들이 복원 계획과 일정을 미리 정해 알린다는 게 황당하기 그지 없는 일입니다. 시민들에게 신라 왕성이 곧 복원될 것이란 잘못된 인식만 심어줄 겁니다.”

인근 신라 고찰 황룡사터에서도 속도전 흔적은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절터 서쪽 회랑 바로 옆에는 2층짜리 콘크리트 건물인 황룡사역사문화관이 고즈넉한 유적들을 내려다보는 위압적 자태로 들어서서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다. 2013년 경주시가 착공한 이 건물은 터를 사전 발굴하는 과정에서 신라 귀족저택 시설로 짐작되는 장방형 연못이 발견된 바 있다. 건물터 자체가 경주왕경 핵심유적 위에 자리한 사실이 드러났지만, 경주시가 쉬쉬하며 공사를 강행해 5월 개관을 앞두고 있다. 뿐만 아니다. 불국토 남산이 멀리보이는 절터 남문터 바로 앞에는 광장과 주차장 조성을 위해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이 연말부터 콘테이너 건물을 세워놓고 발굴에 착수했다. 중문지와 회랑 복원을 위한 준비 작업도 시작할 참이다. 올해는 아니지만, 10~20년 계획으로 시쪽은 강당터와 중금당터, 목탑 복원까지 염두에 두고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고고학계 원로로 추진단 자문위원이었던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당장 시급한 발굴도 아니고, 월성 조사에만 집중해도 인력과 자원이 모자라는 판인데, 시 쪽이 학계와 협의도 제대로 하지않고 황룡사터 곳곳에 발굴판을 벌여놔 지난 10월 자문위원직을 내던지고 나왔다”고 했다. 그는 “지자체가 정치논리에 휩싸여 경주를 복원의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학계의 울분과 우려에도, 현재 경주의 상황은 발굴조사와 복원 일정을 더욱 앞당기는 쪽으로 가고 있다. 경주시는 12월16일 최양식 시장과 김종진 문화재청 차장,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관계자 등이 참여한 가운데 신라왕경 사업추진 보고회를 열었다. 시쪽은 이 자리에서 내년 사업에 국비 453억원 등 647억원을 들여 월성 해자· 남문루 복원, 동궁과 월지 건물 복원, 월정교 문루공사 착수, 황룡사 역사문화관 준공, 절터의 중문 보완 발굴 등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월성은 당장 왕궁 복원을 추진하지 못하더라도, 발굴조사가 대부분 끝나고 유적도 상당부분 정비된 황룡사터와 동궁과 월지(안압지) 일대는 곧장 거액을 들여 건축 복원 사업에 집중하겠다는 계획이다. 최양식 시장은 “올해는 왕경 핵심유적 복원 정비로 천년왕도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원년”이라며 왕경유적의 조속한 가시화에 집중해 발굴·복원의 고삐를 놓지 않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시쪽이 이처럼 경주 유적 복원에 가속페달을 밟는 데는 여러 정치적 배경들이 거론된다. 우선 2018년 지방선거에 대비한 실적성 사업이 필요하고, 경주의 고도 발굴과 관광개발에 관심이 남달랐던 박 대통령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못다한 유지를 잇는다는 역사적 명분도 있어, 수백억원대 예산을 아낌없이 지원하는 현 정권 때 성과를 확실히 만들어야한다는 강박감이 반영되어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경주시 한 관계자는 “정권이 바뀌기 전에 복원 성과를 많이 쌓지 않으면 앞으로 관광고도로서 경주의 볼거리를 제대로 만들 기회가 영영 오지 않을 것이란 조급증이 만연해 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이와관련해 12월2일 경주 현대호텔에서 열린 경주월성조사에 대한 국제학술회의에는 중국 고도 시안과 일본의 고도 나라 유적을 발굴한 중·일 전문가들도 참석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왕경 유적들의 섣부른 복원은 유산의 역사적 진정성 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지적들을 쏟아냈다. 그러나 국내외 전문가들의 고언도 시쪽에는 별다른 울림을 주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중앙정부가 돈을 펑펑 퍼주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월성발굴에 대한 국비예산만 지난해 세배인 210억원으로 늘어났다. 왕경복원 사업은 현장 조사만 빨리 되면, 시간과 돈이 다 해결해줄 것이라는 게 지금 시 공무원들의 대체적인 기류다.

경주시가 희망사항처럼 구상하고 있는 장기 왕경복원 계획은 더욱 놀랍다. 시가 발굴회사인 신라문화유산연구원과 계림문화재연구원에 용역을 맡겨 지난달 8일 최종보고한 신라왕경 핵심유적 정비 복원사업 종합 기본계획(마스터플랜)은 문화재전문가들을 경악시킬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황룡사터와 선덕여상 사이의 신라왕경 추정터에 대한 속성발굴을 벌여 조사가 끝나는대로 백제문화재현단지 같은 신라왕경 재현촌을 만들고, 황룡사터의 핵심건물이었던 금당과 목탑도 20년 안으로 복원해 절집 실물을 대부분 재현하며, 서봉황대 같은 대형 고분도 추가로 파서 70년대의 황남대총이나 천마총 발굴처럼 국민적인 관심을 고조시킨다는 구상이 들어있다. 황룡사터의 대형 건축물들을 재현할 고증자료가 매우 빈약하며, 복원에 들어갈 거대 규모의 국내산 목부재 조달이나 전통 기술자(도편수) 확보가 거의 불가능한 현실적 조건, 권위주의 시대 대형고분 발굴의 시행착오에 대한 부정적 여론 등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이런 생각들로 뭉쳐진 경주시 공무원들이 문화재청 관료들과 함께 권력자의 의중을 살피며 경주 문화유산을 빨리 빨리 발굴하라고 현장의 연구원들을 채근하고 있는 것이 지금 경주의 상황인 셈이다. 경주의 발굴 현장에서 만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한 학예사는 하소연하듯 말했다.

“아무리 뛰어난 조사진을 한꺼번에 투입한다고 해도 미지의 땅속을 뒤지는 문화유산 발굴조사는 파괴와 시행착오를 거듭할 수밖에 없어요. 땅을 파헤치다 착오가 일어나면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물량 위주의 조사와 복원은 갈수록 한계가 드러나게 됩니다. 후세에 물려줄 유적에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을까 싶어 두렵습니다”

경주/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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