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만화의 새 흐름, 자전적 논픽션 만화
“절대 이런 식으로 제 이야기를 쓸 생각이 없었어요. 만화가들은 이야기를 창작하고 싶은 욕구가 있잖아요. 저도 제 경험을 토대로 새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는데 제 이야기를 날것 그대로 내놓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단지’ 작가는 레진코믹스에 연재하는 <단지>라는 만화에서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가족 안에서도 차별받고 감정적으로 학대당한 이야기를 만화로 그린다. 같은 레진코믹스에 연재되는 ‘휘이’ 작가의 <숨비소리>는 우울증을 앓고 있는 어머니와 함께 사는 이야기를 털어놓은 자전적 만화다. 홍연식 작가는 만화 <불편하고 행복하게><마당씨의 식탁>등에서 귀촌생활뿐 아니라 가족에게 갖고 있는 은밀하고 오래된 감정까지 털어놓는다. ‘앙꼬’ 작가는 <삼십살>과 <나쁜 친구>, ‘훈’(hun) 작가는 웹툰 <향연상자>로 자신의 이야기를 그렸다. 지난해엔 다운증후군을 가진 딸과 어린 아들, 그리고 재혼한 연하의 남편과 함께 사는 일상을 그린 장차현실 작가의 <또리네 집>도 출판됐다. 요리, 농사 같은 소소한 일상부터 가족관계, 질병, 친구 등 마음속 문제까지 작가들의 다양한 자기 고백적 서사는 만화의 폭을 넓히고 있다. 지금 만화는 생로병사, 인생의 거의 모든 문제를 다루는 매체다.
요리·농사 같은 소소한 일상부터
가정폭력·약물중독·장애자녀 등
내밀한 경험 고백하는 작품 늘어
외국 자전적 만화 수입도 활발
“자아 앞세운 작가주의 흐름 생겨
2015년, 한국만화 자의식 생긴 해” 만화 번역 그룹인 해바라기 프로젝트 이하규 팀장은 이런 만화들을 “자신의 경험을 털어 일상의 고통을 달래주는 만화”라고 부른다. 한국만의 경향은 아니다. 스웨덴 작가 오사 게렌발의 자전적 만화 <7층>은 데이트 폭력을 다룬 작품이다. 일본 작가 만슈 기쓰코는 알코올 중독에 빠졌다가 극복한 경험을 만화 <알코올 중독 원더랜드>(박하 펴냄)로 그렸다. 만취 상태로 무대에 올라가 사람들 앞에서 가슴을 드러내기도 하고 술에 취해서 동네 사람과 싸우기도 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하는 것도 모자라서 만화로 그리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으리라. 지난달엔 다운증후군을 안고 태어난 딸 때문에 슬퍼하고 부끄러워하다가 결국 그 아이를 사랑하게 되는 프랑스 작가 파비앵 툴메의 <내가 기다리던 네가 아냐>(휴머니스트 펴냄)가 한국어로 나오는 등 외국산 자전적 만화 수입도 부쩍 활발하다. 만화영상진흥원 백수진 글로벌 사업팀장은 “자신들이 겪은 고통을 작품으로 승화하는 한국 논픽션 만화들이 부쩍 늘어나면서 외국 만화들도 다양해지고 있다”며 “육아, 요리, 데이트 심지어는 술 마시는 이야기까지 만화로 나오면서 ‘나’와 작품 속 주인공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또 꾸며낸 이야기인 극화 못지않게 내 이야기인 자전이 주요한 창작방법으로 부각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전한다. 몇년 전만 해도 극화 만화만 출판되고 작가들의 자전적 만화는 단편으로 만화잡지에 실리거나 웹툰으로 나오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지금은 출판물에서도 자신의 일상이나 살아온 이야기를 그린 만화가 상당수다. 청강문화산업대 만화창작과 박인하 교수는 “일본은 사적인 만화라고 불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새로운 작품을 탐색하는 경향, 미국은 <쥐>를 그린 아트 슈피겔만 같은 자전적 그래픽 노블 작가들이 있었는데 지금까지 우리 만화엔 자아를 앞세운 작가주의적 흐름이 없었다”며 “<단지><숨비소리><마당씨의 식탁>등이 쏟아져 나온 2015년은 한국 만화의 자의식이 형성된 시기”라고 평한다. 3인칭 픽션이 지배하는 만화시장에서 지금까지 숨죽이고 있었던 1인칭 목소리가 커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대안만화들을 출판해온 새만화책 출판사 김대중 공동발행인은 “만화라는 매체를 진지하게 바라보게 됐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한국에서도 “만화를 통해 자신을 대면하고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작가주의적 태도가 시작됐다고도 볼 수 있다. 한국에서만 15만부가 팔린 ‘수짱 시리즈’ 마스다 미리 작가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마스다 미리는 1인칭 자기 고백투가 독자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래픽 노블과 히어로 만화 등을 출판해온 세미콜론 출판사 최원 대리는 “마스다 미리 이후 작가의 경험을 담은 자기 고백적 서사들이 독자들에게 먹힌다는 판단으로 수입서에서도 그러한 책들을 좀더 늘리는 추세”라고 했다. 박인하 교수는 대부분의 자기 고백 만화들이 우선 여성적인 화법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주목한다. “여자 작가들은 이 사회에서 겪고 있는 문제들을 끊임없이 자기화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2015년을 기점으로 우리 만화가 한단계 진화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이유다.” 자기 고백적 서사를 대하는 독자들의 태도도 바뀌었다. 웹툰 <단지>를 보면 작가의 분신인 캐릭터는 처음엔 엄마한테 욕먹고 맞았던 이야기를 하면서 자꾸 실실 웃는다. 단지 작가는 전화 인터뷰에서 “처음엔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 웃으면서 하려고 했다. 밝고 재미있는 일상툰 사이에서 우울한 이야기를 꺼내기가 힘들었는데 공감하는 댓글과 메일을 받으면서 나중엔 눈물 흘리는 모습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단지 작가는 2007년 개그만화로 데뷔해 지금까지 4개 작품을 그렸지만 이번엔 필명까지 바꿔서 독선적 아버지와 남아 선호 사상에 매몰된 어머니, 그리고 폭압적 오빠 밑에서 겪은 일들을 세세하게 털어놓았다. <단지>는 지난해 7월8일 연재를 시작한 후 44일 만에 누적 조회수 300만을 돌파했다. 20일부터는 아예 독자들이 보내온 사연만으로 <단지2>연재를 시작한다. 1인칭으로 말하고 싶은 사람이 이렇게 많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가정폭력·약물중독·장애자녀 등
내밀한 경험 고백하는 작품 늘어
외국 자전적 만화 수입도 활발
“자아 앞세운 작가주의 흐름 생겨
2015년, 한국만화 자의식 생긴 해” 만화 번역 그룹인 해바라기 프로젝트 이하규 팀장은 이런 만화들을 “자신의 경험을 털어 일상의 고통을 달래주는 만화”라고 부른다. 한국만의 경향은 아니다. 스웨덴 작가 오사 게렌발의 자전적 만화 <7층>은 데이트 폭력을 다룬 작품이다. 일본 작가 만슈 기쓰코는 알코올 중독에 빠졌다가 극복한 경험을 만화 <알코올 중독 원더랜드>(박하 펴냄)로 그렸다. 만취 상태로 무대에 올라가 사람들 앞에서 가슴을 드러내기도 하고 술에 취해서 동네 사람과 싸우기도 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하는 것도 모자라서 만화로 그리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으리라. 지난달엔 다운증후군을 안고 태어난 딸 때문에 슬퍼하고 부끄러워하다가 결국 그 아이를 사랑하게 되는 프랑스 작가 파비앵 툴메의 <내가 기다리던 네가 아냐>(휴머니스트 펴냄)가 한국어로 나오는 등 외국산 자전적 만화 수입도 부쩍 활발하다. 만화영상진흥원 백수진 글로벌 사업팀장은 “자신들이 겪은 고통을 작품으로 승화하는 한국 논픽션 만화들이 부쩍 늘어나면서 외국 만화들도 다양해지고 있다”며 “육아, 요리, 데이트 심지어는 술 마시는 이야기까지 만화로 나오면서 ‘나’와 작품 속 주인공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또 꾸며낸 이야기인 극화 못지않게 내 이야기인 자전이 주요한 창작방법으로 부각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전한다. 몇년 전만 해도 극화 만화만 출판되고 작가들의 자전적 만화는 단편으로 만화잡지에 실리거나 웹툰으로 나오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지금은 출판물에서도 자신의 일상이나 살아온 이야기를 그린 만화가 상당수다. 청강문화산업대 만화창작과 박인하 교수는 “일본은 사적인 만화라고 불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새로운 작품을 탐색하는 경향, 미국은 <쥐>를 그린 아트 슈피겔만 같은 자전적 그래픽 노블 작가들이 있었는데 지금까지 우리 만화엔 자아를 앞세운 작가주의적 흐름이 없었다”며 “<단지><숨비소리><마당씨의 식탁>등이 쏟아져 나온 2015년은 한국 만화의 자의식이 형성된 시기”라고 평한다. 3인칭 픽션이 지배하는 만화시장에서 지금까지 숨죽이고 있었던 1인칭 목소리가 커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대안만화들을 출판해온 새만화책 출판사 김대중 공동발행인은 “만화라는 매체를 진지하게 바라보게 됐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한국에서도 “만화를 통해 자신을 대면하고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작가주의적 태도가 시작됐다고도 볼 수 있다. 한국에서만 15만부가 팔린 ‘수짱 시리즈’ 마스다 미리 작가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마스다 미리는 1인칭 자기 고백투가 독자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래픽 노블과 히어로 만화 등을 출판해온 세미콜론 출판사 최원 대리는 “마스다 미리 이후 작가의 경험을 담은 자기 고백적 서사들이 독자들에게 먹힌다는 판단으로 수입서에서도 그러한 책들을 좀더 늘리는 추세”라고 했다. 박인하 교수는 대부분의 자기 고백 만화들이 우선 여성적인 화법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주목한다. “여자 작가들은 이 사회에서 겪고 있는 문제들을 끊임없이 자기화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2015년을 기점으로 우리 만화가 한단계 진화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이유다.” 자기 고백적 서사를 대하는 독자들의 태도도 바뀌었다. 웹툰 <단지>를 보면 작가의 분신인 캐릭터는 처음엔 엄마한테 욕먹고 맞았던 이야기를 하면서 자꾸 실실 웃는다. 단지 작가는 전화 인터뷰에서 “처음엔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 웃으면서 하려고 했다. 밝고 재미있는 일상툰 사이에서 우울한 이야기를 꺼내기가 힘들었는데 공감하는 댓글과 메일을 받으면서 나중엔 눈물 흘리는 모습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단지 작가는 2007년 개그만화로 데뷔해 지금까지 4개 작품을 그렸지만 이번엔 필명까지 바꿔서 독선적 아버지와 남아 선호 사상에 매몰된 어머니, 그리고 폭압적 오빠 밑에서 겪은 일들을 세세하게 털어놓았다. <단지>는 지난해 7월8일 연재를 시작한 후 44일 만에 누적 조회수 300만을 돌파했다. 20일부터는 아예 독자들이 보내온 사연만으로 <단지2>연재를 시작한다. 1인칭으로 말하고 싶은 사람이 이렇게 많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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