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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망국의 아픔’ 닮은…역사가 외면한 정림사의 수수께끼들

등록 2016-01-19 20:22수정 2016-01-19 21:35

5층탑과 석불좌상, 연못 등이 남아있는 부여 정림사터의 현재 전경.   사진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5층탑과 석불좌상, 연못 등이 남아있는 부여 정림사터의 현재 전경. 사진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백제 패망의 아픔이 새겨진 탓일까. 이 절터는 역사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백제 불교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고찰로 세간에 알려졌지만, 지금도 절의 창건과 운영, 규모에 얽힌 내력에 대해 지금 우리가 아는 것은 거의 없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 사비성(충남 부여읍)안 한가운데 자리한 고찰 정림사터가 바로 이 비운의 유적이다.

백제 불교 전성기 대표 고찰 불구
창건·운영·규모 아는 것 거의 없어
5층 석탑·석불좌상·건물터 흔적뿐

절터서 나온 진흙 소조상 등 통해
중국 대륙 북쪽 고찰과의 교류 확인
국립부여박물관 작년 11월부터 특별전

정림사터는 백제사의 수수께끼로 가득한 곳이다. 현재 터에 남은 건 1500여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선 5층 석탑과 후대인 고려시대 세웠으나 얼굴이 깎여버린 석불좌상, 연못터와 희미한 건물터 흔적들 뿐이다. 절의 역사와 관련된 문자기록은 정림사 석탑에 낙인처럼 새겨진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백제 정벌 전승기록인 2100여자의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과 1940년대 발굴된 정림사명 새겨진 고려시대 기왓장밖에 없다.

사진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사진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지난해 백제사적 지구로 유네스코 유산 목록에 오르면서 백제 대표유산으로 새롭게 조명받게 됐지만, 절의 실체를 밝히는 과정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42년 일본인 후지사와 카즈오의 첫 발굴조사 이래 70~80년대 충남대 윤무병 교수팀의 2차 조사, 2008~2010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사가 거듭되면서 인자한 미소의 진흙 소조상과 불교 유물들이 무더기로 나왔고, 절터의 배치와 얼개에 얽힌 고고학적 정보도 상당부분 확보된 상태다. 최근 이를 토대로 절의 실체를 둘러싼 여러 학설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정림사를 둘러싼 쟁점들 가운데 핵심은 출토된 불상들과 탑에 얽힌 두가지로 집약된다. 첫번째는 1980년대 이후 정림사터 서쪽 폐기 구덩이에서 쏟아진 불상과 인물 소조상들의 본산지다. 이 상들은 현재 중국 뤄양에 있는 북위 영녕사터의 출토 불상들과 모양새가 거의 똑같다. 백제인들은 자주 교류했던 중국 남조 대신 대륙 북쪽 뤄양에 있는 고찰까지 가서 불상들을 직수입한 것일까. 아니면 백제 장인들이 기술을 갖고 들어와 불상을 만든 것일까. 두번째 쟁점은 2000년대 초반부터 제기된 정림사터 석탑 이전의 목탑 건립설이다. 정림사터에서 나온 작은 중국풍 불상들은 원래 용도가 목탑의 내부를 장식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림사도 마찬가지로 그런 용도로 불상들을 썼다면 목탑이 앞서 지어진 뒤 내부를 장식했다는 가정이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국립부여박물관에서는 이런 쟁점들을 실제 유물들과 견줘보면서 음미할 수 있는 전시가 열리는 중이다. 지난해 11월 개막한 특별전 ‘백제 정림사와 북위 영녕사’다. 중국 뤄양박물관에서 빌려온 영녕사터 출토 불상들과 정림사터에서 나온 불상과 소조상 등을 중심으로 당시 중국과 활발히 교류했던 백제 불교문화와 고찰 정림사가 지닌 역사적 비밀을 살펴보는 자리다.

이 전시의 초점은 정림사와 중국 북위 효문제가 518년 지은 국찰인 영녕사의 교류 관계다. 정림사는 538년 사비천도 직후인 6세기 중반~후반에 창건됐을 것으로 보는 게 통설이다. 전시장 2부 영역에 흙으로 빚고 구운 영녕사 소조상, 불상 40여점과 정림사터 출토 소조상들이 비교 전시되어 있는데, 차이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닮았다. 편안하고 자비스런 얼굴상에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의 옛 북위 스타일의 농관(籠冠)을 쓴 인물상들이 단적인 예다. 구일회 관장은 “너무나 유사해 백제인들이 일부러 북위를 찾아가 직수입했을 가능성이 훨씬 커 보인다”고 말한다.

그러나 단순히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견해도 만만치않다. 중국 남조 도읍이었던 난징 건강성 주변의 홍토교란 곳에서 최근 정림사터나 영녕사터 소조불과 거의 같은 모양새의 소조불들이 무더기 발견된 것이다. 따라서 남조의 난징에서 이 소조불의 기본 도상이 창안돼 북위나 백제로 전파되거나, 아니면 북위에서 도상이 창안돼 백제나 남조로 전파됐다는 가설이 모두 가능하다. 게다가 정림사라는 사찰은 한·중·일 세 곳에 모두 존재한다. 중국 난징에도 상정림사터가 있고, 6세기 백제의 불교문화를 직수입한 일본의 고도 아스카 지방에도 백제풍의 정림사터가 남아있어 당시 한·중·일간에 긴밀했던 불교문화 교류상을 보여준다.

또다른 쟁점인 목탑의 존재를 둘러싼 논란은 출토 기와, 토기, 벼루 등의 유물들과 발굴된 절터 영역 등의 사진, 출토 자료들을 전시한 1부를 보면서 떠올릴 수 있다. 6세기 중엽 정림사가 창건되면서 원래는 큰 목재 중심기둥이 내부를 받친 목탑을 먼저 세우고 그 안에 중국에서 직수입한 소조불 등을 붙이는 식으로 장식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이병호 국립중앙박물관 학예관 등의 소장연구자들에 의해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2000년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석탑터 주변을 추가 발굴한 결과 두툼한 흙다짐층 외에는 목탑터의 구체적인 흔적이 확인되지 않아, 지금도 학계는 목탑지 여부를 놓고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목탑이 있다가 화재 등으로 사라져 석탑을 쌓았다는 추정이 나오지만, 화재의 흔적인 불먹임 자욱 등은 별로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어지는 3부에서는 1940년대 조사에서 확인된 고려시대 정림사명 기왓장과 고려시대 석불, 그리고 소정방이 탑에 새긴 평제비 탁본을 입체적인 구조물을 통해 감상하며 절터의 역사를 음미할 수 있다. 전시를 기획한 김미경 학예연구사와 한봉규 학예실장은 “정림사터에 얽힌 역사적 실체 논란은 사실 탑 자리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서만 풀릴 수 있는 성격이지만, 세계유산인 탑을 섣불리 해체 조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앞으로도 논쟁은 거듭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전시는 24일까지다.

부여/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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