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성일(45)씨는 2006년부터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수사학적 글쓰기’란 이름의 영어 작문 강의를 하고 있다. 강의 후기를 보면 ‘최고의 글쓰기 강의’ ‘새로운 지식세계로의 입문’ 등 의례적 수준을 넘는 찬사가 꽤 있다. 그의 제자들은 대학교수, 번역가, 연구원 등 영어로 뭔가를 써야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강의를 들은 뒤 전문번역자의 길을 걷고 있는 이도 20여 명이 넘는다. 그의 생업 역시 영어 글쓰기다. 스마트폰과 같은 제품의 영문 사용설명서(매뉴얼)를 만들고 편집하는 일이다. 지난 26일 서울 신촌역 주변 한 카페에서 ‘영어 글쓰기의 달인’을 만났다.
2006년부터 한겨레문화센터 명강사
‘수사학적 글쓰기’ 전문번역자 배출
20명 한정해 이메일 지도까지 ‘철저’
고교때부터 습작…대학땐 연설문 ‘알바’
뉴욕주립대 ‘수사학·작문학’ 박사 수료
“한국 대학 ‘평가용 글쓰기’로 쓸모없어”
수강생을 20명으로 한정하는 이유를 물었다. “수강생이 쓰는 영어 학술논문의 스토리텔링 등을 이메일로 지도할 때가 많아요. 수를 더 늘릴 수가 없지요.” 학술논문에 스토리텔링이라니?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디엔에이의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해 53년 <네이처>에 발표한 논문을 지금도 달달 외우고 있지요. 학술서사의 새 장을 연 논문입니다. 다윈의 <종의 기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과학 논문도 객관적 사실 못지 않게 연구자의 의지나 의도와 같은 심리적 실체를 어떻게 전달하느냐의 문제, 즉 스토리텔링이 중요합니다.”
번역가들은 왜 그의 강의를 들을까. “작가들의 문체를 주로 논합니다. 헤밍웨이는 요지 다음에 부연설명이 오고, 헨리 제임스는 배경 설명이 먼저 나오고 요지가 뒤따르는 문체이죠. 번역 실무에 도움이 되는 강의는 아닙니다.(웃음)”
그는 고교 시절 영·한 대역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사서 영문 쪽을 접고 한글 번역문을 보며 매일 영작 연습을 했다. 고 2때는 영작에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에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의 ‘영어통사론’ 저서 영문판을 구해 읽기도 했다. 이런 열정은 열매로 이어졌다. 92년 들어간 중앙대 영문과 재학 시절 부총장의 영어연설문을 대신 써주는 ‘알바’를 했다. 영어 쓰기와 말하기 능력자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졸업 뒤 그는 대우자동차에서 2년 가까이 근무한 뒤 99년 미국 유학을 떠났다. 애초 심리언어학을 배우려했으나 전액장학금을 타기 힘들어 고향인 평택의 한 피시방에서 열심히 미국 대학을 검색한 끝에 뉴욕주립대학원(올버니 캠퍼스)의 수사학과 작문학 전공을 찾아냈다. 3년8개월 유학생활 끝에 석사학위와 박사 수료증을 따냈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수사학(레토릭)을 근거가 약한 주장을 강한 것으로 꾸며 사람들을 속이는 것으로 경멸했다. 하지만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을 학문의 세계에 편입시켰다. 대학의 글쓰기 교육과 수사학은 어떻게 연결될까? “그리스 로마시대 수사학은 말을 통한 설득이죠. 그게 20세기 중반 미국에선 글을 통한 소통으로 전환됩니다. 코넬대가 수사학 관련 많은 고전을 간행한 게 계기였죠. 말의 비유법이 글로 그대로 옮겨간 것입니다. ‘신수사학’이라고도 합니다. 글을 분석하는 과정이죠.” 미국 대학들이 스토리텔링 등의 방식으로 글의 소통력을 강화하는 교육에 힘쓰는 배경인 셈이다.
소통을 강조하는 실무적 글쓰기 교육은 학문의 세계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고 그는 설명했다. “미국이나 독일을 보면 학술논문 제출자의 절반이 직장인입니다. 직업적 실무지식을 글쓰기로 전환하는 시스템이 견고합니다. 모든 학문의 궁극적 목적은 글쓰기라고 생각하지요.”
한국의 대학은? “10여년 전부터 서울대를 시작으로 여러 대학에서 글쓰기 센터를 만들었죠. 하지만 여기선 글 못쓰는 학생에게 철자법과 띄어쓰기를 가르치는 교육을 합니다. 평가를 위한 교육이죠. 별 쓸모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대학도 실무적 글쓰기 교육을 강화해야 할까? 그는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한국 사회엔 글쓰기의 실용적 목적이 없는 편”이라고 토를 달았다. 왜? “삼성 홍보실 직원을 보세요. 글쓰기에 어려움을 느끼는 이들이 있지만 조금 불편할 뿐 그렇다고 쫓겨나지는 않습니다.” 실무적 글쓰기를 배우더라도 현실에서 그리 유용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그는 영문매뉴얼 제작업체 에이에스티(AST)의 사내 전문연구소인 에프에이시시(FACC) 수석연구원이다. 주중 3일 일하는 이 회사에서 그는 실무자들이 작성한 영문매뉴얼이 세계 표준에 맞춰 번역되었는지 검토하고 편집한다. “삼성 티브이 매뉴얼을 전세계 해외번역업체들에게 넘겨주려면 매우 높은 품질의 영문으로 번역해야 합니다.” 그는 기업들의 문서정책 컨설팅도 한다. 최근 삼성 에스디에스 쪽에 아이비엠과 같은 높은 수준의 문서정책을 도입할 것을 제안했다. “아이비엠은 거래처와 주고 받는 이메일까지 포함해 사내 문서를 광범위하게 수집해 이를 마케팅에 활용하는 콘텐츠 전략을 취하고 있죠. 스티브 잡스는 70년대 애플2 컴퓨터를 티브이에 광고하면서 매뉴얼 텍스트를 전면에 등장시켰지요.”
그는 매주 토요일 오전 강의를 마친 뒤, 문학번역과 프리라이팅을 테마로 하는 두 개의 ‘학습모임’을 이끌고 있다. 수강생 제자들이 주축이다. “전문번역가라해도 1년 수입이 천만원 이하입니다. 그런데 일부 번역학원은 장밋빛 환상을 심어주며 지망생들에게 수백만원의 수강료를 챙기고 있어요.”
난해하기로 정평이 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를 6번 읽었다는 나씨는 한국 최고의 번역가로 정영목씨를 꼽았다.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샐린저 작)는 매우 난해한 소설인데, 정씨 번역본은 정확하고 유려하더군요.” 덧붙여 이런 말도 했다. “다음 세대 번역가들은 정씨와 같은 정확한 번역을 넘어 콘텐츠에 대한 비평 역량과 번역 자체에 대한 전문적 식견도 갖춰야 합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