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년의 우에다 마사아키 교수. 최선일 박사(미술사) 제공
가신이의 발자취
별세한 우에다 마사아키 교토대 명예교수
별세한 우에다 마사아키 교토대 명예교수
지난해 나온 다큐영화 <정조문의 항아리>(감독 황철민)를 보면, 일본의 한반도 문화재를 모아 1988년 교토에 고려미술관을 건립한 재일동포 사업가 정조문(1918~89)을 돕는 일본 역사학자가 종종 등장한다. 바로 영화의 추진위원장인 우에다 마사아키 교토대 명예교수다. 13일 오전 교토 가메오카 자택에서 89살로 별세한 그는 한·일 지식인들과의 교유 속에 고대 한-일 교류사 연구에 물꼬를 튼 선구자였다.
그는 정조문, 작가 시바 료타로 등과 함께 69~81년 <일본 속의 조선문화>라는 계간지를 만들었던 주역으로 일본 각지의 한반도 도래인 유적의 답사 안내를 도맡고, 뒤풀이 자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꽹과리를 울리곤 했다.
우에다는 국가주의 사관에 젖어 있던 근대 일본 고대사학계에 동아시아 교류사 관점에서 언어학, 민속학 등의 다양한 방법론을 동원해 일본사를 재구성하는 ‘우에다 사학’으로 새바람을 일으켰다. 정조문·김달수·이진희 등 재일동포 지식인들과 60년대부터 교유하면서 고대 일본에 건너간 한반도 사람들의 발자취를 찾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65년 내놓은 명저 <귀화인>에서 ‘귀화인’이란 차별적 용어로 재단되던 고대 한반도인들의 명칭은 국적 개념이 없고, 한반도의 선진문화 수입에 적극적이던 고대 일본의 실정과 맞지 않는다며 ‘도래인’이란 새 개념을 제안했다. 그 뒤 ‘도래인’이 공식 용어로 정립되고 교과서 기술까지 고치는 성과를 거두었다.
1927년 효고현에서 태어난 그는 중학 시절 당대 역사학계 거장이던 쓰다 소키치의 연구서를 읽고, 정통 역사서로 배웠던 <고사기>나 <일본서기>에 사실 자체가 별로 없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 태평양전쟁 때 학도병으로 도쿄 조선소에서 일하다 공습으로 친구가 죽자 숱한 민중의 희생을 강요하는 천황제의 실체와 고대 일본의 성립 과정에 회의를 품고 교토대에 들어가 고대사 연구를 시작했다.
63년 교토대 교수가 된 그는 일본 고대 왕권이 도래인에 의해 규슈에서 중부 간사이로 퍼져갔다는 왕조 이동설과, 일본 고대왕조의 기틀을 세운 6세기 비다쓰왕은 백제 귀족이고, 교토에 천도해 헤이안 왕조를 세운 간무 일왕의 생모는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라는 사실 등을 <신찬성씨록> 등 실증적 사료를 토대로 밝혀내어 파문을 일으켰다. 4세기 백제 왕실이 왜왕에게 보내준 칼인 ‘칠지도’가 문헌상 명백히 하사에 해당한다는 분석을 내놓은 것도 한-일 교류사 연구에 중요한 디딤돌이 됐다. 2008년 일왕가의 초청을 받아, 아키히토 일왕과 백제-일본의 불교 전파, 교류사와 관련한 대화도 나누었던 그는 임나일본부설을 신봉하는 극우세력들의 협박 편지를 수차례 받기도 했다.
‘조선학교를 지지하는 모임’ 발기인을 맡는 등 한·일 지식인의 역사연대와 사회적 실천에도 열심이었다. 지난 연말 펴낸 <고대 일본과 동아시아의 신연구>까지 81권의 저술을 냈고, 공저는 500권이 넘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1970년대 일본 내 한반도 도래인 유적을 찾은 답사 현장에서 우에다(오른쪽) 교수가 설명하고 있다. 그의 왼쪽이 재일동포 정조문이다. 교토 고려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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