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평야의 너른 들녘이 가없이 펼쳐지는 전북 김제시 부량면 일대. 여기로 가면 역사책에도 나오는 1600여년 된 고대 저수지와 돌로 쌓은 제방유적의 장관을 함께 볼 수 있다. 사적 111호인 벽골제(碧骨堤)다. 4세기초 백제 비류왕 때 쌓은 것으로 추정하는 이 벽골제는 세간에 국내 최고, 최대의 고대 수리시설 유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3년여전부터 고고학자들이 벽골제를 집중발굴하면서 벽골제의 옛 제방 모습을 짐작케하는 새로운 발굴 성과들이 잇따라 쏟아지는 중이다.
발굴기관인 전북문화재연구원(이사장 최완규)은 이달 초순부터 벌인 벽골제 6차 발굴조사에서 제방에 물길을 트던 수문이던 중심거(中心渠)의 터 전체를 발굴해 옛 형태와 구조, 축조방법을 확인했다고 29일 발표했다. 중심거는 2013년 조사 당시 확인된 핵심수문으로, 이번 전면 조사를 통해 벽골제의 옛 수문들이 어떤 얼개와 기능을 지녔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됐다. 16세기 나온 조선시대의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벽골제에는 수문 다섯 개가 있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현재 시설이 남은 것은 장생거·경장거 뿐이며, 이번에 터가 확인된 중심거 외의 나머지 두 개는 이후 허물어져 지금은 구체적인 자취를 알 수 없는 상태다.
연구원의 발표자료를 보면, 제방의 가운데 자리했던 중심거는 현존하는 2개의 수문인 장생거(長生渠), 경장거(經藏渠)처럼 양쪽에 돌기둥을 세우고 수문을 여닫아 물을 흘려보내는 얼개를 띠고 있다. 터를 발굴해서 살펴보니 중심거의 잔존 규모는 길이 1770㎝, 너비 1480㎝로 양쪽에는 돌기둥(石柱)의 일부가 남아있었다. 현재 돌기둥 상단부는 훼손되고 너비 83㎝, 두께 70㎝ 크기의 하단부만 잔존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두 돌기둥 사이 바닥에는 길이 420㎝, 너비 84㎝의 여닫이 돌문짝(하인방석下引枋石)을 놓았으며, 중앙에 나무판을 넣을 수 있도록 홈을 파놓았다. 돌기둥과 하인방석은 요철 모양으로 맞물리게 연결한 것이 특징이다. 물길인 도수로(導水路)에는 물이 흘러나갈 때 벽체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100~200㎝ 정도의 크기로 잘 다듬은 직사각형 화강암 석재를 써서 석축을 쌓았다. 석축은 물길 북쪽에 길이 1140㎝, 너비(중앙 부분) 420㎝ 규모로 2단 정도만 남아있었다. 도수로의 바닥은 침하를 막기위해 사람 머리 크기의 할석(깬돌)을 거칠게 쌓은 뒤 위에 100~150㎝ 크기의 화강암으로 된 박석(薄石)을 깔았다. 물길 바깥은 방수되는 물의 흐름을 원활하게 트이도록 하기 위해 ‘八(팔)’자 모양으로 벌어지게 처리한 점도 눈에 띈다.
벽골제 중심거에서 확인된 수문의 형태는 중국 상하이 우쑹강 하구에 자리한 15세기 원, 명대의 수문터인 지단원원대수갑(志丹苑元代水閘) 유적과 비슷한 구조란 점이 주목된다고 한다. 흙층 사이에 나뭇가지, 잎사귀 등을 켜켜이 깔면서 제방을 쌓는 부엽공법(敷葉工法)을 사용한 사실은 후대에 쌓은 일본 오사카 근교의 고대 저수지 사야마이케(狹山池)에서도 확인되는 부분이다. 연구원 쪽은 “이번 발굴에서 드러난 벽골제의 제방 성토공법과 수문 쌓기 기법 등은 한·중·일 수리시설 간의 비교 연구에 중요한 근거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벽골제 발굴현장은 29일 오후 3시부터 일반 공개된다. 자세한 내용은 전북문화재연구원(063-246-7968)에 문의하면 안내를 받을 수 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전북문화재연구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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