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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신라왕궁 월성 중량급 유물이 지천에

등록 2016-03-30 14:39수정 2016-03-30 21:08

30일 낮 경주 월성 유적에서 열린 현장설명회 모습. C지구의 12호 대형 건물터 석렬 앞에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직원이 발굴 경위를 취재진에 설명하고 있다. 사진 노형석 기자
30일 낮 경주 월성 유적에서 열린 현장설명회 모습. C지구의 12호 대형 건물터 석렬 앞에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직원이 발굴 경위를 취재진에 설명하고 있다. 사진 노형석 기자
천년잠 깨운 ‘속도전’ 현장

51×50m 안에 14개 건물터 발굴
8세기 통일신라 관청터 추정
토제벼루 50여점 쏟아져 나와
6부중 하나인 본피부 명문기와도
아래 지층엔 앞선 시대 문화층
“살펴볼 유적, 유물들이 정말 많죠?”

발굴 현장을 안내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직원이 되물었다. 신라의 천년궁터라는 경주 월성 유적 현장설명회가 열린 30일 낮 취재진은 방대한 유적을 돌아보느라 숨이 가빴다. 6만평 넘는 궁터 곳곳에 연구소가 1년 사이 파낸 유적, 유물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대형 건물터 14곳이 700여평에 밀집된 채 드러난 월성 한가운데 C지구를 시작으로 서쪽 A지구의 성터, 성문터 조사 현장을 거쳐 북쪽 성곽 바깥의 해자(연못)터 발굴장까지 1㎞ 남짓한 거리 이동에 1시간여가 걸렸다. 세 유적 모두 하나하나 따로 설명회를 열어야 할 정도로 중량급 유적들이다. 불과 1년 사이 이 유적들을 한꺼번에 발굴하고 공개한 탓에 기자들은 어떤 유적이 핵심인지를 물으며 우왕좌왕했다. 지난해 3월 정부와 경주시가 신라왕경 복원을 내걸고 발굴에 착수한 이래 강행한 속도전 발굴의 필연적인 결과다.

성과는 적지 않았다. C지구에서 관청터로 추정되는 8세기께 대규모 건물터들이 무더기로 드러났고, 괴수 모양의 토제벼루 조각들과 다양한 글자들이 새겨진 명문 기와, 토기류 등도 쏟아졌다. A지구의 성문터와 성곽 바깥의 해자(연못)에서는 조선시대 통행로와 후대 건물터 흔적들이 각각 발견됐다.

토제벼루의 괴수다리 조각들. 사진 노형석 기자
토제벼루의 괴수다리 조각들. 사진 노형석 기자

C지구 대형 건물터는 전체 넓이가 781평에 달했다. 동서 51m, 남북 50.7m의 정사각형 모양으로, 외곽에 담장을 둘러친 터 안팎에 14기의 건물터가 흩어져 있다. 토제 벼루, 인화문(도장무늬) 토기와 연꽃무늬 수막새 등 통일신라 후기 유물들이 다량 출토돼 건립 시기는 8세기 중반 이후로 보인다. 특히 터에서는 고대의 문방구인 토제벼루의 괴수다리 조각들이 50여점이나 나와 눈길을 끌었다. 토제벼루는 월성 주변 동궁터와 월지(안압지)에서도 나왔지만, 출토량이 훨씬 많다. 건물 용도가 문서들을 작성하는 관청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인’(典人), ‘본’(本) 등 전례 없이 다양한 글자들이 새겨진 명문기와들도 딸려 나왔다. 전인은 궁궐에 딸린 와기전(기와나 그릇을 굽던 관아)에 속한 장인, 본은 신라의 정치체제를 구성한 육부 중 하나인 ‘본피부’(本彼部)로 보인다는 설명이다.

‘정도’(井桃), ‘전인’(典人), ‘본’(本) 등이 새겨진 명문기와. 사진 노형석 기자
‘정도’(井桃), ‘전인’(典人), ‘본’(本) 등이 새겨진 명문기와. 사진 노형석 기자

연구소는 C지구 안 두 지점을 골라 지층을 4m 정도 파고들며 시기별 문화층도 탐색했다. 조사 결과 궁터 지하에는 통일신라 2개 문화층과 이전 고신라 5개 문화층이 깔린 것으로 확인됐다. 연구소 쪽은 “현재 확보된 탐색자료를 보면 신라문화층은 가장 이른 시기가 4세기다. 이후 9세기까지 왕궁 시설이 존속했다가, 신라 멸망 뒤에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수년 전 연구소가 조사한 성 바깥 해자 신라유적층의 가장 이른 시기가 4세기보다 올라가지 않는다는 분석 내용과 같다. 반면 <삼국사기> 등 사서에는 5대 파사왕 22년(101)에 월성을 처음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어 200년 이상 차이가 생긴다. 앞으로 학계의 민감한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12월초부터 조사한 궁터 서쪽 A지구에서는 8세기 전후 성벽을 고친 흔적과 더불어, 문터에서 조선시대 잔자갈을 깔아 만든 좁은 통행로도 드러났다. 성벽 안쪽에서는 전례가 없는 용도 불명의 특이한 기와가 나왔다. 6세기 전후 신라에서 만든 무늬 없는 암막새와 비슷하지만, 돌출부가 옆구리에 달린 독특한 제작 기법을 써서 주목된다. 성곽 바깥 해자의 경우도 연못 석축의 안쪽 부분까지 후대 건물이 들어선 흔적이 드러나 해자가 시간이 갈수록 기능을 잃고 축소된 것으로 밝혀졌다. 연구소 쪽은 올해 C지구의 나머지 건물터와 해자 내부, 성문터 발굴에 주력할 계획이나, 발굴 범위가 너무 넓다는 지적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경주/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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