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낮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본관 앞에서 이영훈 신임 관장이 운영구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이날 간담회에서 “수장고도 열어젖히겠다는 각오”를 밝히며 여전히 폐쇄적이란 지적을 받아온 박물관을 열린 공간으로 확 바꾸겠다고 공언했다. 사진 노형석 기자
“수장고까지 국민 앞에 열겠습니다. 들어가 전시투어도 하게 하고, 일부 수장고는 전시 진열장처럼 바꿀 겁니다.”
“각 지역에 있는 산하 박물관들 호칭을 차별적인 지방 박물관 대신 소속 박물관으로 바꾸라고 했어요. 여건이 열악한 13개 소속 박물관에 예산, 인력을 대폭 키울 수 있도록 힘을 쏟겠습니다.”
이영훈(60) 신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하나하나 현안을 짚으며 이야기를 풀었다. 31일 오전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경내 식당에서 취임 뒤 첫 간담회를 연 그는 “박물관이 폐쇄적이고 배타적이란 인식을 씻는 데 노력하겠다”는 다짐부터 했다. 2007년 이래 10년 가까이 국립경주박물관장으로 일한 이 관장은 “본가나 친정으로 다시 돌아온 느낌”이라며 “소장품 연구 수준을 높여 내부 역량을 강화하고 국민, 외부 기관과의 개방·협력을 강화하겠다는 두 목표를 세웠다”고 털어놓았다. 서울대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이 관장은 전주, 경주, 부여 등의 지방관장과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실장을 거치며 34년간 전시기획과 박물관 행정 등에서 남다른 내공을 쌓아왔다. ‘준비된 관장’이란 내부의 평대로 말투엔 시종 자신감이 어려 있었다.
“박물관에 소장된 유물만 38만점이 넘는데, 진열장에서 관객과 만나는 유물은 훨씬 적지요. 국민들이 수장고 유물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이 커요. 이런 유물들을 제대로 발굴하고 그 맥락을 살리면서 전시할 필요가 있어요. 제가 경주 관장 시절 황남대총이나 천마총 같은 경주 고분 기획전을 하면서 수장고 발굴 전시를 했는데, 관객에게 주는 효과가 컸어요.”
최근 전임자 김영나 관장이 프랑스 명품업체가 후원한 장식미술 전시의 무산 책임을 지고 청와대 외압으로 물러났다는 <한겨레> 보도와 관련해 경질 배경을 묻는 질문들도 쏟아졌다. 이에 대해 그는 “정무직 인사대상자로서 답변하기 적절하지 않은 자리다. 우리 박물관은 국가기관이고 전시를 함께 하려던 파리장식미술관은 법인이라 성격이 다르다. 전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프랑스 명품업체들이 모인 콜베르재단의 후원을 받으려 했던 것”이라고 에둘러 답했다. 그는 “내년 초 프랑스장식미술관의 옛 소장품으로만 꾸린 전시가 열린다”고 밝혀, 명품업체 후원 전시는 재개할 의향이 없다고 못박았다. 다만 “외국에서 상업적 전시가 들어온다고 다 거부할 수는 없다. 상대국의 문화 풍토, 관객이 좋아할 것인지 등을 고려해서 결정해야 할 것”이라며 다른 분야를 두고서는 여지를 뒀다.
업무 영역이 비슷해 신경전을 벌여온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와 공사립 박물관들에 대해서는 “전시, 사업 등에서 공유, 협력하며 함께 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내부 연구업무에도 학계의 객원연구원을 초빙하겠다”면서 열린 자세를 강조한 그는 1920년대 일본인들이 금관 등을 발굴한 뒤 보고서를 내지 않은 경주 서봉총을 4월부터 재조사한다는 계획도 꺼냈다.
낙랑유적을 공부한 고고학도였지만, 그는 문화예술인 기질이 다분한 박물관인이다. 대학 시절인 70년대 말 연극판에서 꽤 인정받는 배우였다. 극단 연우무대의 77년 창단멤버였고 <아침에는 늘 혼자예요> 같은 창작극의 주연을 맡으며 2년여간 활동했다. 발성이 정확하고 움직임이 날렵해 계속 극을 했다면 좋은 배우가 됐을 것이라는 게 정한룡 연우무대 예술감독의 말이다. 82년 국립박물관에 들어온 그는 이후 각 지역 관장을 지내면서 특유의 예인 기질을 전시들로 풀어냈다. 시·군 단위 문화재 발굴전, 출토 유물들을 송두리째 내놓은 황남대총·천마총 특별전, 신라사인물전 등 신선한 얼개의 기획전들을 잇따라 꾸려 ‘전시의 귀재’란 평을 받아왔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