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 초상화(오른쪽). 사진 노형석 기자
‘시대의 선각자, 나혜석…’ 특별전
유족이 기증한 초상화 등 선보여
유족이 기증한 초상화 등 선보여
“이분의 얼굴? 글쎄요, 얼굴 전부를 상상하기에는 너무나 터무니가 없고… 동양화의 미인처럼 퍽 다정스럽고 그윽한 매력에 빛나리라고.”
한국 근대소설의 거장 이태준(1904~?)은 조선 최초의 여성 근대화가 나혜석(1895~1948)을 두고 자신이 상상해온 풍모를 이렇게 적었다. 1933년 <문학타임스>란 잡지에 실린 ‘못본이 상상기’의 일부다. 나혜석, 박화성 등 당시 잘나가던 여성 예술가들을 남성 문인들이 나름 상상의 필력으로 떠올려보는 기획이었다.
실제로 20~30대 시절 사진 속에서 나혜석의 용모는 이태준의 상상처럼 단아하고 당당했다. 그러나 쉰셋 나이로 끝난 그의 일생은 끝내 아름답지 못했다. 일제강점기에도 온존한 남존여비 유교 질서와의 거듭된 대결로 삶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외교관 김우영과의 결혼과 유럽여행에서의 외도, 이혼 뒤 이혼고백서 발표와 자유연애론 주창 등으로 숱한 소문을 몰고 다녔고, 말년 세상의 무관심 속에 보육원, 양로원을 전전하다 행려병자로 숨졌다. 남존여비의 시대상과 맞서싸웠던 여성주의의 선구자, 당대 세계적 사조와 시·소설·그림 등에 두루 통달했던 인문적 지식인, 21년 조선 최초의 유화 개인전을 열었던 화가로서의 발자취는 아직 온전한 평가를 기다리는 중이다.
경기도 수원 화성행궁 들머리 수원아이파크미술관에서 시대와 끝내 불화했던 나혜석의 화가 인생을 엿보게 된다. 지난달부터 열리고 있는 ‘시대의 선각자, 나혜석을 만나다’전(8월21일까지)이다. 명성과 달리 세간에 거의 공개되지 않았던 그의 그림과 사진, 글과 편지 등의 실물 자료들을 볼 수 있는 드문 자리다. 1층 전시장에 나온 작품, 아카이브는 다른 근대 대가들 회고전에 비해 초라할 정도로 규모가 작다. 하지만 사후 50여년간 별난 여성 화가란 세평 말고는 미술계에서 거의 관심 두지 않았고, 2000년대 들어서야 학계의 재조명이 본격화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번 전시의 의미는 적지 않다.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 지난해 유족들이 기증한 남편 김우영과 나혜석의 초상이다. 1928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 속 두 사람은 모두 굳은 얼굴에 긴장과 불안감이 스며 있다. 특히 나혜석의 자화상은 강렬한 보색에, 과감한 붓터치로 유럽의 야수주의 화풍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28년 여행 도중 파리 야수파 화가의 화실에서 공부한 영향이 보인다. 유럽여행 중 나혜석이 유학생 최린과 정분이 생기면서 남편과 사이가 틀어졌던 정황도 얼추 짐작할 수 있다. 1910년대 도쿄에서 미술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매일신보>와 각종 잡지 등에 실었던 삽화, 판화 등도 흥미롭다. 감각적인 선으로 여성들의 일상 노동과 몸짓 등이 그려져 젊은 시절부터 여성적 자의식이 강했다는 것을 직감하게 해준다. 후원자였던 일본 나라의 학교운영자이자 수집가 야나기하라 가문에서 입수한 나혜석의 후원 요청 편지, <삼천리> 등 각종 잡지에 숱하게 발표했던 여행기와 여성의 역할을 강조한 글 등도 눈에 띈다.
전시를 보고 나서 곁에 있는 동네인 행궁동을 산책하면서 만나게 되는 생가터는 초라하기만 하다. 터 위의 퀀셋 가건물에 어색하게 붙여놓은 금속판 생가터 표석이 불꽃같았던 여성 화가의 복권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031)228-3800.
수원/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1932년 작업실의 작품 앞에 선 나혜석. 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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