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77살인 박일영씨의 아버지는 구보 박태원(1909~86)이다. 이상, 이태준과 함께 구인회 멤버였던 박태원은 근대적 도시 풍속의 변화를 그리는 데 남다른 솜씨가 있었다. 서울 도심을 배회하는 식민지 예술가의 쓸쓸한 내면을 그린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나 청계천변 군상의 삶을 카메라로 훑듯 세세히 묘사한 <천변풍경> 등은 지금도 폭넓은 독자군을 거느리고 있다.
일영씨는 구보가 딸 둘을 먼저 본 뒤 서른에 얻은 첫아들이다. 그는 장남의 돌을 기념하기 위해 가족과 지인 1천명이 각각 한자를 한 글자씩 쓴 ‘천인천자문’을 만들기도 했다. 그처럼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이 아들이 최근 아버지를 회고하는 책 <소설가 구보씨의 일생: 경성 모던보이 박태원의 사생활>을 펴냈다. 미국 워싱턴디시 인근 페어팩스에서 살고 있는 일영씨를 지난 4일 전화로 만났다.
‘경성 모던보이 박태원의 사생활’ 써내
50년 월북전까지 11년간 각별한 사랑
천명의 첫돌 축하글로 ‘천인천자문’도
“가족이산에도 작가 박태원 삶은 행복
나는 ‘팔보’…둘째딸 ‘칠보’ 자처해 문신”
서울이 인민군 세상이던 50년 9월22일 박태원은 남조선문학가동맹 평양시찰단의 일원으로 남동생인 화가 문원과 함께 북으로 길을 떠났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6일 뒤 서울은 다른 세상이 되었다. 아버지와 큰누나는 북한, 어머니(김정애)와 2남2녀는 남한 땅으로 갈라졌다. 어머니는 인민군 치하에서 여성동맹 간부를 맡은 게 화근이 돼 4년7개월 옥고까지 치렀다.
‘오갑빠’ 헤어스타일(앞머리를 빗어내린 뒤 일직선으로 자른 머리)
구보가 31년 도쿄에서 돌아오며 선보인 ‘오갑빠’ 헤어스타일(앞머리를 빗어내린 뒤 일직선으로 자른 머리)은 당시 모던보이의 상징과 같았다. ‘머릿결이 아버지(박태원) 성격처럼 억세 그렇게 한 것’인데, 태어나기 전이라 직접 본 적은 없다고 일영씨는 말했다. 그는 아버지를 두고 ‘동서양을 통해 모범이 되는 아버지’였다고 했다. “결혼 이듬해 68년 큰딸을 낳고 1년 뒤 미국 가서 둘째 딸을 낳았어요. 동서양 아버지를 직접 체험한 제가 보기에 모범적인 아버지였다는 의미죠.”
혜화국교 다닐 때 “인적이 드문 구멍가게에서 아버님과 함께 아이스크림을 핥던” 순간 등 그가 11년 동안 아버지와 나눈 행복한 기억이 책 곳곳에 뿌려져 있다. “해방 뒤 성북동 별장에 살 때, 한겨울 둥그런 소반에 풍로를 들여놓은 뒤 프라이팬에 즉석 김치찌개를 끓여 먹었죠. 미군부대에서 나온 소시지나 베이컨을 넣었어요. 가장 기억에 남아요.”
숙명여고 수석졸업 뒤 충북 진천에서 교편을 잡다 구보와 결혼한 ‘신여성’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어떨까. “어머니는 전쟁 뒤 집안의 모든 일을 홀로 다 하셨어요. 말년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뇌경색으로 말도 못하고 돌아가셨어요. 미안한 마음이 많아요.”
아들은 ‘아버지의 인생은 행복하셨다’고 적었다. 북에서도 몇 개월의 창작 금지 기간을 빼고는 계속 글을 쓸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구보는 50대 중반 시력을 잃은 뒤에도 초인적 의지를 발휘해 장편 <갑오농민전쟁>을 완성했다. 일찌감치 붓을 놓아야 했던 상당수 남한 출신 작가들과는 다른 행로였다.
‘작가 박태원’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였을까? “작품 서두를 쓸 때 수도 없이 원고지를 버리셨죠. 아침에 보면 종이가 한없이 구겨져 있었어요. 아버님의 문장이 좀 치렁치렁 이어지잖아요. 더 이상 퇴고할 이유 없이 멋있게 빠졌다 생각하면 그 대목을 읽어주셨죠. 그때 가장 행복하셨을 거예요. 연재소설도 멋있는 대목은 우리에게 얘기해줬어요. 연사가 연설하듯 (아버지가 번역한) 삼국지 얘기를 죽 들려주기도 했죠.”
‘상상을 좋아한다’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북으로 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라고 물었다.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불후의 명작 같은 구보씨의 일생을 탄생시켰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는 작가 박태원을 가능하게 한 원천으로 “천재적 유머와 위트, 시대를 앞서간 생각”을 꼽았다. “구보 탄생 100돌 때, 젊은이들 사이에 아버지의 헤어스타일이 지금도 먹힌다고 하더군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도 그렇고요. 천재였죠.”
그는 아버지의 북행을 두고 “본의 아니게”란 표현을 썼다. 평론가 백철은 구보가 ‘친구(이태준) 따라 강남(북) 갔다’고 표현했다. “젊어서는 (백철의 표현에) 동의했죠. 80을 바라보는 지금은 아닙니다. 당신의 운명, 팔자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내가 미국에 온 것도 그 이유를 대자면 댈 수 있지만, 실제로는 어찌어찌해서 그렇게 된 것이죠.”
회고록을 끝내며 그는 이렇게 적었다. “행복하셨습니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아버지/ 그리고 고맙습니다, 사랑하는 문원 아저씨, 나의 작은어버지시여!” 박문원(1920~73)은 남로당 활동으로 두 차례 옥고를 치렀고 월북해 미술단체 간부를 지냈다. 고구려 고분 연구의 권위자이기도 하다. “작은아버님, 고모님이 골수 공산주의자였죠. 아버지가 북에서 역사소설 위주로 별다른 간섭 받지 않고 자신만만하게 글을 쓸 수 있었던 데는, 일제시기 때 지닌 명성에다 (골수 공산주의자인) 동생의 삶도 영향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아버님이 거기에 편승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일영씨는 지난 90년 방북해 큰누나·고모·사촌·새어머니(권영희씨) 등과 상봉의 기쁨을 누렸다. 그 뒤 몇년간 서신 왕래를 이어갔으나 지금은 끊겼다고 했다. “90년 갔을 때 북에서 버스 한 대를 내줘 송별회를 했어요. 친척이 40여명 되더군요. 남쪽보다 더 많아요.”
63년 서울대 수학과를 졸업한 일영씨는 미국에 가기 전까지 출판사인 정음사에서 일했다. “69년 공부하려고 미국에 갔는데, 원했던 컴퓨터과학 전공 진학이 쉽지 않아 학업을 포기했죠.” 그의 둘째 딸은 몇년 전 그의 허락을 받고 몸에 한자 ‘칠보’로 문신을 했다. “정음사 사장이던 최영해씨가 저를 두고 ‘구보는 안 돼도 팔보 정도 된다’고 농으로 그러셨죠. 그 얘기를 했더니 막내가 자기는 칠보쯤 되는 것 아니냐며 문신을 했어요. 허허.”
강성만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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