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지역에서 드러난 우물 내부의 출토 유물들.
1500여년전 신라시대 촌주 ( 村主 : 지방 유력자에게 준 말단 행정관직 ) 의 이름이 새겨진 청동접시가 경주 황룡사터에서 나왔다. 발굴기관인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은 최근 절터 남쪽 담장터 부근을 발굴한 결과 ‘달 온심 촌주(達溫心村主) ’라는 촌주의 이름이 새겨진 청동접시와 함께 신 라 시대 도로 , 배수로 등의 도 시 시설과 황룡사의 대지 축조방법을 알 수 있는 자료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황룡사는 553 년 ( 진흥왕 14) 창건된 신라 최대 규모의 사찰이며 , 신라왕경 핵심권역 안에 자리하고 있다.
청동접시가 나온 곳은 통일신라 말기에 폐기된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 유적으로, 황 룡사터의 서남쪽 경계부에서 드러났다. 촌주의 이름이 새겨진 자료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접시는 제사 때 사용한 토기 등과 함께 묻혔던 것으로 미뤄 절의 의례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도 있다고 조사단은 추정했다. 우물 안에서는 편평하고 납작한 편병 ( 扁甁 ) 등의 토기류 , 중국백자 조각, 평기와 , 청동제 손칼 등도 나왔고, 당시 사람들의 식생활을 짐작할 수 있는 밤 , 복숭아, 잣 등의 씨앗껍질과 생선뼈 등도 함께 발견됐다.
또하나 주목되는 것은 황룡사터와 동궁터 사이를 잇는 동서도로와 황룡사 동쪽에서 분 황사로 연결되는 남북도로가 확인 되었다는 점이다. 조사결과 도로면에는 20 ∼ 30cm 정도의 굵은 돌을 깔아 기초를 만들고 , 그 위에 잔자갈을 깔아 노면으로 쓴 흔적이 드러났다.
도로의 한쪽에는 너비 100cm, 깊이 40~100cm 의 배수로를 팠고, 후대 배 수로를 메워 도로를 넓혀 쓴 자취도 확인된다. 조사단 쪽은 “일부 지역에 한해 발굴조사가 이뤄져 도로터 전체와 도로에 맞닿아 있는 광장의 전모는 드러나지 않은 상태다. 앞으로 단계별 조사를 통해 도로와 광 장에 대한 윤곽이 확인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앞서 1980~2000년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벌인 신라왕경유적과 황룡사터 주변지역에 대한 조사결과를 보면 광장터는 너비 약 50m,
도로는 너비 약 15.5m이며, 동서도로가 황룡사터에서 동궁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추정해왔다.
청동접시에 새겨진 촌주의 이름 부분을확대한 사진. ‘달온심촌주(達溫心村主)’라는 글자가 명확하게 보인다.
조사단 쪽은 또 이번 조사에서 황룡사터의 대지가 <삼국유사> 등 옛 사서의 기록대로 원래의 습지를 매립해 조성됐다는 사실도 재확인했다고 밝혔다. 대지는 남쪽에서 북쪽 , 동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30 도 정도 경사지도록 흙을 교대로 다지 면서 쌓았다 . 바닥에는 굵은 돌을 깔았고 , 일정한 간격으로 자갈층을 반복해 다지면서 배수처리를 하는 등 신라시대 토목기술의 진수를 잘 보여준다는 평가다 . 흙을 쌓은 성토층 아래의 습지에서는 6 세기 무렵의 토기편이 출토돼 진흥왕 시기의 황룡사 창건 기록과도 일치한다는 게 연구원 쪽의 설명이다. 발굴조사 성과는 17 일 오후 2 시 열리는 발굴현장 설명회에서 일반 공개된다.
자세한 내용은 신라문화유산연구원 ( 070-4350-4705) 으로 문의하면 된다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청동접시에 새겨진 촌주의 이름 부분을확대한 사진. ‘달온심촌주(達溫心村主)’라는 글자가 명확하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