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도씨 문화콘텐츠로서의 게임
“게임의 폭력성을 알아보기 위해 피시방 전원을 한번 내려보겠습니다.” 멀쩡히 게임 중이던 아이들은 당혹감에 욕설 등을 하며 격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2011년 2월 문화방송 <뉴스데스크>에서 내보낸 이 뉴스는 결국 방송통신심의위원회 ‘경고’까지 받았다. ‘비객관적이고 작위적인 실험 결과를 게임의 폭력성과 직접 연관 지어 단정적으로 보도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게임에 대한 한국 사회의 편견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현재 16살 미만 청소년은 밤 12시부터 새벽 6시까지 게임 접속을 못하게 하는 ‘셧다운제’가 실시중이고, 게임을 술, 도박, 마약과 묶어 4대 중독물질로 규정하는 ‘게임중독법’이 발의되기도 했다. 우리가 규제로 시끄러운 와중에도 세계 게임 시장은 성장세다. 2015년 매출은 약 943억달러, 100조원을 넘어섰다. 국내 게임 시장 역시 10조원 규모로 성장했고 수출액은 3조원을 돌파했다. 게임의 무게추는 모바일로 이동하고 있다. ‘히트’ ‘이데아’ 등 100억원대 개발비가 투입된 대작 모바일 게임이 등장하는 등 어느새 모바일 게임이 피시 온라인 게임 규모를 따라잡았다. 피시 온라인 게임은 신작보다는 ‘리니지’ 등 기존 강자들이 업데이트를 통해 시장을 수성하는 모양새다.
게임의 탄생은 하나의 세계관의 탄생이자, 게임 개발자와 이용자 간 문화적 상호작용의 출발이기도 하다. 책 <게임의 문화코드>(이동연 씀)에선 게임을 단순한 놀이 수단이 아닌 사회를 이해하고 삶을 성찰하는 매개체로 정의한다. 특히 온라인 다중접속 역할수행 게임(MMORPG)에서는 이용자들간의 협력, 즉 팀플레이를 통해 공동체 의식을 함양할 수도 있단다.
치열한 시장 경쟁 속에 거대한 문화 현상으로 자리잡고 있는 게임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국내 대표적 게임 기업 엔씨소프트의 판교 ‘게임 공장’을 찾아 게임 개발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2012년부터 서비스 중인 3디(D) 다중접속 역할수행 게임 ‘블레이드 & 소울’(이하 블소)이 탐색 표적이다.
■ 그는 왜 파쿠르를 배웠을까 블소는 500여명이 투입돼 5년 넘게 500억원을 들여 만든 게임이다. 직접 그린 원화 7000여장, 1000여벌의 캐릭터 의상, 1시간30분 분량의 게임 속 영상을 자랑한다.
대자본이 투입되는 다른 문화 영역들과 마찬가지로 게임 탄생의 시발점은 기획과 선택이다. 해마다 제기되는 수십개의 기획과 아이디어 가운데 프로젝트로 발전해 실제 개발로 이어진 대작 게임은 4, 5년에 1편꼴이다. 선택받기 위해선 목표가 뚜렷해야 한다. 블소는 엔씨소프트의 기존 작품인 ‘리니지’처럼 서양 중세 판타지를 구현한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문화가 골고루 섞인 동양의 세계관을 담았다. 떠오르는 중국 시장을 겨냥한 측면도 있다. 다양한 라인업을 구축하려는 의도도 깔렸다. 개발팀은 ‘왜 롤플레잉게임(RPG)은 중세 판타지만 배경으로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계속 곱씹었다고 한다.
줄거리는 무협소설을 떠올리게 한다. 여러 명의 작가(시나리오 라이터)가 참여해 이야기를 짰다. 무일봉 ‘홍문파’에서 무공을 배우던 나(이용자)는 어느 날 사부와 악연이 있는 진서연에 의해 사부와 사형들이 모두 살해당하는 비극을 맞는다. 나는 복수를 위해 진서연의 뒤를 쫓고 그 과정에서 진정한 영웅으로 성장한다는 이야기다. 블소 개발실 이차선(38) 시나리오 라이터는 “블소는 평화로운 삶이 깨지면서 시작된다. 게임을 통해 이용자는 대영웅이 되지만 결국 처음 평범했던 삶이 가장 행복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고 말했다. 게임 서사는 ‘엔딩’이 없다는 특징이 있다. 사용 과정에서 계속 스토리가 업데이트된다. 이차선 라이터는 “이용자와 소통하며 계속 세계를 확대해가게 된다”고 말했다.
‘이야기’ 구성 다음 과제는 이를 게임 영상으로 구현하는 작업이다. ‘블소’에선 특히 경공, 활강, 벽타기 같은 무협 액션 동작의 실감나는 표현이 중요했다. 블소 개발실 박상현(37) 리드 시스템디자이너는 “실존 무술을 많이 참고했고 동작을 만들어내는 애니메이터가 파쿠르를 배우기도 했다. 팀원들이 모형 칼을 가지고 싸워보기도 했다”고 말했다.
■ 마트에서 사온 꽃게는 어디에 쓰였을까 게임을 게임답게 만드는 것 중에 하나는 효과음이다. 챙-챙 부딪히는 소리가 없다면 칼싸움이 무슨 재미며, 몬스터를 죽일 때 그냥 툭 쓰러진다면 무슨 보람이 있을까. 약 40여명이 근무하는 사운드실은 효과팀과 음악팀으로 나뉜다. 박준오(37) 믹스레코딩팀 과장은 국내에 다섯 명 정도밖에 없는 폴리 아티스트이다. 게임 분야에서는 그가 유일하단다. 드라마 <또 오해영>(티브이엔) 속 에릭의 직업이 바로 폴리 아티스트다. ‘게임 공장’ 지하 2층에는 효과음만을 위한 별도의 스튜디오가 있다. 발자국 소리를 내는 발판들과 냄비, 모의총, 야구 글러브, 심지어 욕조도 스튜디오 안에 있다. 블소 이야기 전개에서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는 ‘비천검’이 공명하는 소리는 종에다가 바이올린 활을 그어 만들었다. 곤충류 괴물을 죽일 때 나는 소리는? 꽃게 등껍데기를 손으로 뜯을 때 나는 ‘바사삭’ 소리를 활용했다.
■ <와호장룡>을 보고 또 본 그 사람은 누구 영화 오에스티(OST)처럼 게임 오에스티도 있다. 상상 속 방대한 세계를 그리기 때문에 스케일 자체가 다르다. ‘블소’ 작곡가들은 게임 속 모든 지역에 음악이 깔리면서도 같은 음악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 총 1071곡을 만들었다. 당시 작곡가인 사운드실 김창범(39) 음악1팀 팀장은 “양도 양이지만, 동양적 느낌을 살리는 것도 중요했다. 서양 오케스트라를 쓰되, 목관악기 비중을 높이고 가야금, 대금, 단소에다 중국 악기 얼후까지 넣었다”고 돌이켰다. 그 ‘느낌’을 찾아내기 위해 <와호장룡> <라스트 사무라이> <왕과 나> 등 여러 영화를 섭렵했다. 그는 게임 음악만의 매력을 “상호작용성”이라 꼽았다. 전투의 전개, 이용자의 동선 등에 따라 자연스레 배경음악이 바뀌는데, 이 때문에 개발 초기부터 프로그래머와 협업을 많이 하게 된다. 그는 “여기선 음악과 기술이 하나”라고 했다.
■ 검은 피는 무엇을 의미할까 ‘블소’는 2013년 11월 중국을 시작으로 2014년 일본과 대만, 올해 1월 북미, 유럽권에서도 서비스를 시작했다. 각 문화권에서 요구하는 대로 콘텐츠를 수정해야 하는 일이 잦다. 중국은 자국산 게임 보호를 위해 1년에 20개의 게임만 심의를 통해 서비스 허가권을 준다. 선정성, 폭력성에 대한 기준이 특히 까다로운데 빨간 피는 검은색으로 바꾸고, 관절을 꺾거나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 안 됐다. 해골이라도 목이 떨어지면 안 되고, 목이 붙어 있으면 되는 식이다.
북미권 담당자는 서비스 전 ‘양성평등’을 위해 캐릭터 옷 수정을 요구했다. 사실 ‘블소’의 여성 캐릭터는 과장된 신체 표현이나 노출이 심한 의상 때문에 비난을 받기도 했다. 북미권 담당자는 “노출을 하려면 남녀 모두 하거나 혹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의견을 제시했다. 결국 이런저런 수정 끝에 북미권 담당자가 직접 만든 ‘루비’라는 캐릭터가 탄생했다. 문화적 차이가 충돌하면서 서로 놓치고 있던 지점들을 찾아내기도 하는 셈이다.
■ 묵화마녀의 사연을 더 알고 싶다면 게임은 수많은 캐릭터와 이야기의 줄기를 갖고 있어 2차 콘텐츠 개발이 쉬운 분야다. ‘블소’의 경우, 지난해 부산 게임페스티벌(지스타) 무대에 오른 뮤지컬 <묵화마녀 진서연>으로 다시 태어났다. 게임 오에스티를 그대로 이용하는가 하면, ‘미디어 파사드’를 통해 무일봉 등 게임 속 공간을 무대 위에 살려냈다. 게임 초반 악녀로만 인식되는 진서연의 과거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블소’의 세계를 보다 풍성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는 평을 받는다. 그 외에도 3편의 웹툰, 일본에서 선뵌 애니메이션 등 ‘블소’의 확장은 계속되고 있다. 올 하반기엔 리니지와 더불어 ‘블소’의 모바일 버전도 출시될 예정이다.
블소 이용자는 출시 당시 국내에서 최고 동시접속자 수(이하 동접) 24만을 기록했다. 중국에선 출시 두 달 만에 최고 동접 150만을 돌파했고, 북미, 유럽권에서는 출시 3주 만에 누적 이용자 수 200만명을 달성했다. 일단 만들어진 게임은 확장, 또는 사멸의 진화 경로를 밟게 된다. 블소는 어떤 길을 갈까.
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 사진 엔씨소프트 제공
블레이드&소울 9가지 직업군 중 ‘린검사’의 액션 동작.
‘폴리 아티스트’ 박준오 과장이 게임에 효과음을 입히고 있다.
블레이드&소울 오에스티(OST)에 사용된 중국악기 얼후.
상하이 지하철역에 내걸린 ‘검령’(블소 중국 서비스명)광고.
뮤지컬<묵화마녀 진서연>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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