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세 28억 쓴 ‘임시 물막이’ 중단 전말
멀리서 본 반구대 암각화의 모습.
반구대 대곡천 상류에 2015년 설치된 외부 모형 실험장. 암벽 근처에 시설물과 자재들이 어지럽게 흩어져있다. 실내 모형 실험의 실패로 실제 실험이 이뤄지진 않았다.
암벽 훼손 우려 등 반대의견에도
여권에선 별다른 검증 없이 ‘덥석’
결국 모형실험 모두 실패로 끝나 사업 합의해준 문화재청쪽 증언
“대통령과 총리실의 의지대로
당시 중재안 수용 압박 거셌다”
지방선거 의식탓 보존문제 꼬여 이젠 댐수위 조절·식수원 확충 등
다시 원점서 현실적 대안 찾아야
“정부 차원 대체 급수방안 설득이
반구대 문제 해법의 단초가 될 듯” 그러나 이런 기대는 불과 석달여 뒤 물거품이 된다. 울산시는 사연댐이 식수원이라며 문화재청 안을 절대 수용할 수 없다는 자세를 고수했고, 논의가 벽에 부딪히자 그해 5월 새누리당과 총리실이 논의에 끼어들었다. 이들은 ‘가변식 임시 물막이댐(카이네틱 댐)’이란 대안으로 청을 압박했다. 여당과 총리실이 주목한 건 그해 5월6일치 <중앙일보>에 함인선 건축가가 내놓은 제안이었다. 암각화 암벽에서 8m 정도 떨어진 곳에 철골구조를 세운 뒤 높낮이가 자동조절되는 가변형 투명 플라스틱 물막이댐을 임시보호시설로 설치하자는 구상이었다(함 건축가는 그 뒤 언론 인터뷰에서 이 안이 제자인 대학원생의 아이디어였다고 털어놓았다). 앞서 박 대통령은 그해 4월 청와대 회의에서 “그것(반구대 암각화)만 생각하면 가슴 아프다”고 밝혀 해결을 촉구하는 사실상의‘지침’을 던졌고, 이듬해 지방선거까지 의식한 여권은 데꺽 함 건축가의 제안을 절호의 중재안으로 점찍고 청에 곧장 수용을 채근했다. 결국 2013년 6월16일 문화재청과 울산시, 국무조정실, 문화체육관광부는 업무협약을 맺어 가변형 물막이댐을 추진하기로 한다. 기세 만만했던 변 청장은 자리를 걸고 맞서는 대신 굴욕적으로 고개를 숙여 소신을 꺾었다는 구설에 올랐다. 하지만, 이렇게 추진된 대안은 지난 21일 문화재위원회가 “안전성이 충족되지 못했다”며 사업 중단을 최종 결정해 실패로 끝났다. 그사이 3년이란 시간과 28억여원의 예산이 날아갔다. 2013년 합의 이전부터 문화재 전문가들은 가변형 물막이가 안전성이 검증된 바 없고, 암벽을 훼손할 위험이 크다는 이유로 강한 반대 의사를 표명해왔다. 정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폭넓은 의견수렴을 거치지 않고 안을 강행했다. 고민에 빠진 문화재위원회는 이듬해 4월 사전 검증 실험을 거치라고 의결해 제동을 걸었다. 곡절 끝에 실내 모형 1, 2, 3차 실험이 지난해 12월과 올해 4, 5월 실시됐지만, 모형 물막이판들이 수압에 못 이겨 줄줄이 새는 결과만 나왔다. 기술검증평가단은 최근 낸 보고서에서 “물을 막는 수밀성 테스트가 실패해 실외 모형 실험까지 추가로 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문화재청 쪽은 “문화재위가 암반을 갈거나 뚫어 시설물을 설치하지 말라고 권고했는데, 건축가의 설계안은 거꾸로 암반 지하에 시설공간(공동구)을 뚫는 내용까지 포함돼 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했다. 이런 실험 결과는 2013년 합의 당시에도 상당수 전문가들이 예측했고, 김정배 당시 위원장 등 일부 위원들은 실험할 필요조차 없다는 입장이었다. 문화재청도 그해 5월초 정치권이 낸 가변형 물막이댐 제안에 완곡한 반대 성명까지 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5월말 태도를 갑자기 뒤바꾸게 된다. 5월30일 열린 반구대암각화 보존활용 정책포럼 회의에서 가변형 댐 제안을 전폭 수용하고 암벽 앞에 임시차수벽을 내놓은 안을 들고나와 전문가들을 어리둥절하게 하더니 2주일 뒤 문화재계에서 ‘굴욕’이라고 평한 합의발표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들은 당시 상황에 대해“대통령과 총리실의 의지대로 중재안을 받아야 한다는 압박이 거셌다. 힘이 약한 군소 부처에서 다른 대안은 꺼내지도 못할 분위기였다”고 증언했다. 실제로 황우여 당시 새누리당 대표는 2013년 5월2일 반구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며 직접 현장에서 최고위원회를 열었고, 이후 청와대와 문화체육관광부, 국무조정실 등에서 변 청장과 문화재청 간부들에 대한 전방위적인 설득과 압박이 진행된 정황이 드러난다는 게 문화재계 인사들의 전언이다. 대통령 의중과 선거 표밭을 의식한 정치권의 섣부른 대책이 대통령과 변 청장의 공약을 되레 빈말로 만들어 버린 셈이다. 이제 논의가 원점으로 돌아간 상황에서 어떤 대안을 택할 수 있을까. 울산시가 주장해온 대곡천 생태제방 안은 경관 파괴가 필연적이다. 문화재위원회에서 이미 두차례 울산시 안이 부결됐고, 앞으로도 수용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따라서 사연댐 수위 조절과 식수원 추가 확보 등의 현실적 가능성을 따지는 것이 관건이 될 전망이다. 울산시 사정에 밝은 학계 한 전문가는 “울산시 쪽이 태화강 수영대회 때 수질개선을 위해 사연댐 물을 흘려보낸 적도 있고, 낙동강 취수량도 상당수 확보할 수 있는 상황이어서 물 사정이 그리 열악하지는 않다는 것을 현지 공무원들도 인정하고 있다. 다만, 계속 인구가 급증하는 도시여서 잠재적인 급수용량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한 고려대상이 될 것”이라고 짚었다. 중앙정부 차원에서 울산시가 확보 가능한 식수 용량을 정밀조사하고 현실적인 대체 급수안을 내놓아 조정하는 것이 해법의 단초가 될 것이란 분석들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한겨레> 자료사진
반구대 벽화를 보호하는 가변형 물막이댐(카이네틱 댐) 개념도. 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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