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말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본관 앞뜰에 복원된 충주 정토사터 홍법국사탑과 탑비.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본관의 동쪽으로 가다 보면 앞뜰에 늘어선 석탑들의 행렬을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지방 곳곳의 사찰 등에서 뜯어와 원래 박물관이 있던 경복궁 경내에 진열했던 것을 2005년 이후 다시 용산으로 옮겨와 복원한 불탑들이다.
올해 6월말 이 ‘제자리를 잃은’ 탑들의 안식처에 새 동료가 들어왔다. 원래는 충북 충주 개천산 자락의 고찰 정토사터에 있던 고려초 고승 홍법국사의 승탑(국보 102호)과 그의 탑비(보물 359호)다. 일제가 1915년 경복궁 조선총독부 박물관 앞에 옮겼다가 이 건물이 96년 철거되면서 해체된 뒤 20년간 박물관 수장고에 있다가 다시 복원돼 나온 것이다.
충주 옛 정토사터 영역 안에 원형대로 남아 있는 홍법국사탑비 자리의 지대석. 박물관 쪽은 지대석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실제 복원 과정에서는 논의에 올리지 않았다.
홍법국사는 당에서 선종을 유학하고 돌아와 고려 성종 때 대선사, 목종 때 국사의 칭호를 받은 당대 큰스님이었다. 승탑과 탑비도 일급 장인이 상상력을 부려 만들어졌다. 앙증맞으면서도 현대적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승탑의 동그란 몸돌은 파격적이고 창의적인 당대 디자인 감각의 진수이며, 용머리 조각의 힘찬 표현이 돋보이는 탑비 또한 신라말~고려초 탑비 유행을 이끈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이런 명작들이 최근 어두운 수장고를 벗어나 다시 햇빛을 보게 된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두 작품을 바라보는 문화계의 시선은 마뜩잖다. 박물관이 충주 절터에 남은 원래 부재들을 활용하지 않고, 기단부 등을 새 부재로 땜질해 ‘내 맘대로’ 복원을 강행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홍법국사 탑과 탑비의 복원은 박물관의 ‘수장고 소재 야외석조물 전시계획’에 따른 것이다. 수장고에 부재가 해체된 채 보관 중이던 5개 탑을 2021년까지 박물관 바깥에 복원한다는 내용이다. 지난해부터 올해 초까지 석재의 보존처리와 새 부재 보충을 거쳐 6월 한달간 설치공사 끝에 복원된 홍법국사탑·탑비가 그 첫 성과다.
홍법국사탑의 원래 자리에 놓여 있는 용도 미상의 연화문 부재들.
학계는 박물관 쪽이 복원에 앞서 논의해야 할 부분을 외면했다고 지적한다. 탑과 탑비가 있던 충주 정토사터 영역에 원래 자리와 부재들이 온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탑비는 아래 지대석이 모두 확인되며, 승탑도 연꽃무늬 새겨진 상석 등의 용도 미상 부재들이 다수 흩어져 있다. 80년대 단국대 등에서 조사해 탑과 탑비의 위치와 부재들의 상황을 사진 등으로 기록한 보고서도 있다.
문화재 복원은 원래 재료를 쓰고 원래 자리로 되돌리는 것이 원칙이다. 박물관 쪽은 상당수 부재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지만, 실제로는 논의 과정에 올리지 않았다. 박물관 쪽은 “원래 경복궁 시절 탑이 있던 상태대로 되돌리는 것이 복원 목표였다”고 했다. “지난해 10월 학예사들이 충주에서 조사했지만, 현장 부재들이 아귀가 안 맞거나 용도가 잘 파악되지 않아 도움이 안 될 것으로 자체 판단했다”는 해명이다. 별도의 부재를 조달해 탑과 탑비를 복원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문화재청과 문화재위원회에 복원 현상변경안을 제출해 승인을 받았다는 것이다. 문화재청 쪽은 “박물관 안에는 원래 부재에 대한 활용 방안 등은 없었고 탑을 앉힐 지반 안정도와 부재 보존처리 내용에 대한 것들만 있었다”고 전했다.
20세기 초 일제가 뜯어 옮기기 전 정토사터 원래 자리에 있을 때의 홍법국사탑.
복원된 홍법국사탑과 탑비 아래쪽엔 허연 새 돌로 지대석을 깔았다. 탑의 고향인 충주 일대의 돌을 구해 썼다고 한다. 학계에는 수긍하기 어렵다는 의견들이 많다. 불교조각사가인 엄기표 단국대 교수는 “전문가들과의 소통보다 박물관 판단이 최우선이라는 식의 사고가 논란을 불렀다고 본다”며 “앞으로 석조물 복원 과정에서는 원래 터와의 관계나 현장 부재의 활용 등에 대해 신중한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엄기표 단국대 교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