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연말 신라천년 궁터인 경주 월성에서 벌어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발굴 작업 현장.
이땅에 묻힌 고대 유적들을 파서 발굴하는 고고학자들은 요즘 학계가 어느 때보다 난국을 맞았다고 한탄한다. 정부 공약인 고도 경주 월성의 속도전 발굴복원 논란을 필두로 다국적 기업 레고의 유치장소로 확정됐다가 국내 최대규모의 선사고대 유적이 확인돼 보존을 놓고 진퇴양난에 빠진 춘천 중도, 재개발 삽날 앞에 허물어질 위기에 놓인 청주 테크노폴리스단지 유적 등 간단치않은 초대형 유적의 보존현안들이 수두룩한 탓이다. 이 현장들은 대개 정권과 지자체 눈치를 보는 국책연구기관과 영리에 매달리는 발굴회사들이 맡으면서 공개를 제한하고 있어서 연구자 입장에선 진단할만한 정보를 얻기도 쉽지않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고고학회가 메스를 들었다. 개발·복원과 문화재지구 지정을 놓고 갈등이 빚어진 대형유적 네곳을 골라 문제점을 진단하는 행사를 마련했다. 9일 대전 충남대 박물관에서 ‘한국 발굴현상 진단’이란 제목으로 열리는 학술회의다. 학회 차원에서 처음 발굴현장의 제도적 문제를 진단하고 성찰하는 자리다.
‘경주 월성 발굴의 목적과 과제’를 발제한 안재호 동국대 교수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지난해 낸 ‘월성발굴조사 마스터플랜 보고서’에 나타난 문화재당국의 매장문화재 인식이 관광자원 개발정책과 다름없다고 비판한다. 불가능한 신라왕궁 복원에 매달리지 말고 친자연적인 유적정비로 지역경제활성화와 유적보호를 달성해야한다는 견해다. 왕궁복원이 불가능하다면 재정비용 낭비를 막기위해 장기계획 발굴을 재검토해 수립해야하며, 생태학·인류학·고동물학 등 세부 전문가들도 대거 조사에 참여시켜야한다는 주문도 했다.
춘천 중도동 유적발굴을 진단한 심재연 연구원(한림고고학연구소)의 발제도 논지는 비슷하다. 남한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거대 유적이 확인됐으나 지자체에서 보존조치를 감당할 수 없는 실정이라면서 신라왕경 정비복원 같은 급하지 않은 문화재 정책을 근본적으로 재조정해 이 부분 재원을 중도 보존책으로 돌리는 방안을 찾자는 제안도 내놨다.
이밖에 양시은 충북대 교수는 재개발을 위한 시간단축 위주의 논리로 진행된 청주 테크노폴리스 사업터 조사의 전말을, 정해득 한신대 교수는 정조의 첫 무덤자리(초장지)가 발견된 뒤 보호구역 범위를 놓고 사업자쪽과 갈등을 빚어온 경기 태안3지구 등에 대해 발표할 예정이다. 이남규 학회 회장은 “발굴현장의 학술적 의미에만 치중하고 제도에 얽힌 문제점에 대해서는 제대로 비판하지 못했던 학계의 허물을 반성하는 자리다. 현 상황을 개선하려는 실천적 노력의 차원으로 봐달라”고 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