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 없는 ‘해시태그 예술계 성폭력 말하기’ 운동이 점점 더 확산되고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성폭력 피해 사실을 공개하고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이 사과문을 올리는 이런 흐름은 지난 17일 트위터에서 ‘#오타쿠_내_성폭력’ 해시태그가 처음 제안되며 촉발되었다. 불길은 문단뿐 아니라 출판계, 영화계, 운동권, 예술학교 등으로 번지는 모양새다. 인터넷 정보의 남성중심성을 비판하며 나온 ‘페미위키’는 ‘성폭력 피해 공론화’ 페이지를 따로 마련했다. 이곳의 ‘주요 해시태그’를 보면, ‘#문단’이나 ‘#미술계’를 비롯해 항목이 무려 20개에 육박한다. 최근엔 이를 모아 기록·저장하는 아카이빙 계정이 속속 생성되며 ‘해시태그 성폭력 말하기’의 주제도 넓어지고 있다. 성차별적 발언, 혐오 표현, 추근거림 등 다양한 성적 괴롭힘으로 확장되는 추세다.
#문단_내_성폭력
물꼬를 튼 것은 문학 쪽이었다. 지난 19일 트위터에 박진성 시인한테서 성희롱을 당했다는 글이 오른 뒤 다른 피해자들의 고발이 잇따랐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박 시인은 주로 ‘시를 가르쳐 주겠다’며 접근했으며, ‘자살하겠다’고 협박해 성추행하거나 피해 여성의 의사와 무관한 성관계(성폭행)를 했다고 한다. 박 시인은 22일 블로그에 사죄문을 올려 출간 계획들을 철회하고 에스엔에스 계정도 닫겠다고 밝혔다. 단, 언론과 인터뷰를 통해 성폭행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21일엔 출판사 편집자 출신 여성이 트위터에서 중견 소설가 박범신의 성희롱·성추행을 고발했다. 술자리에서 박 작가가 동석한 여성의 허벅지와 허리 등을 주물거렸으며 성희롱 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박 작가는 사과의 뜻을 밝히고 10월 말 예정이던 신작 소설 <유리> 출간을 무기 연기했다. 그러나 “(술자리에서) 손을 잡고 (성적인) 농담을 한 것은 맞지만 허리에 손을 두르거나 허벅지를 더듬은 일은 없다. 그 점은 다른 참석자들도 확인해 주었다”고 말했다.
24일엔 이준규 시인에 대한 고발 글이 에스엔에스에 올라왔다. ‘나랑 자서 네 시가 좋아진다면 나랑 잘래?’ 같은 말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시인은 트위터에 “기억나는 일은 아닌데, 저의 지난 술버릇과 여성을 대하는 가벼운 태도로 보아, 사실로 보는 것이 맞고 그러니 인정한다”며 사과했다. 배용제 시인에 관한 충격적인 증언도 26일 에스엔에스에서 나왔다. 배 시인이 2012~15년 시 창작 모임을 하면서 미성년자들에게 부적절한 신체 접촉을 하고 성관계를 제의했다는 것이다. 일부 피해 여성은 성폭행을 당했다고도 밝혔다. 배 시인이 “내가 문단에서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 줄 아느냐. 내 말 하나면 누구 하나 매장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말했다고 알려지면서 논란이 증폭됐으나 곧 사과문이 나왔다. 같은 날 ‘화난 여자들’이라는 트위터 계정이 작가 김아무개씨의 성폭력 혐의를 고발했다. 그가 성적으로 접근하거나 추근거리며 압박해왔다는 내용의 진술이 잇따랐다. 이에 김씨는 에스엔에스를 통해 사과하고 절필을 선언했다. 그밖에도 25일 백상웅 시인이 대학 시절 과거 창작 뒤풀이 모임에서 후배를 성추행했다는 고발이 트위터에 올라왔고 백 시인이 피해자에게 사과하기도 했다. 이이체 시인 역시 에스엔에스에서 성폭력 가해자로 고발돼 27일 잘못을 인정하고 집필 활동 중단 의사를 밝혔다.
현재 트위터에서는 김아무개, 황아무개, 송아무개 등 다른 시인들의 성폭력 혐의도 함께 거론되는 상태. 한국작가회의와 한국시인협회 같은 문인단체는 회원 문인의 성폭력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제명이나 자격정지 등 적절한 조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박진성 시인의 시집 <식물의 밤>(2014)을 출간한 문학과지성사는 21일 유감 표명 사고를 내고 해당 시집을 출고 정지시켰지만, 배용제·이준규·이이체 등 자사에서 시집을 낸 시인들이 잇따라 추문에 휩싸이자 곤혹스러운 모습이었다.
#미술계_내_성폭력
미술계의 ‘말하기’ 바람은 지난 21~22일 함영준 일민미술관 큐레이터가 상습 성추행을 했다는 여성 작가들의 잇따른 온라인 폭로에 뒤이어 함씨가 에스엔에스에 곧장 사죄문을 올린 게 발단이 됐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해온 함씨와 함께 잡지를 만들어온 ‘도미노’ 동인들도 사과문을 내고 관련 출판물 발행을 중단하는 등 후폭풍이 컸다. 그 뒤에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큐레이터 ㅊ씨가 성추행 가해자로 거론돼 규탄 댓글이 잇따르자 미술관 쪽이 경위 조사에 들어갔으며, ㅎ작가, ㅇ작가, ㅅ기획자 등 미술인 20명의 실명, 익명을 거론한 성추행 내용이 온라인상으로 쏟아져나왔다. 가해자로 지목된 몇몇 작가, 기획자는 사과문을 올렸으며, 일부 작가는 경찰서에 자진출두해 가해 사실을 알리고 죗값을 받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사태가 커지자 몇몇 여성 미술인은 피해 내용과 사과문을 한데 모은 트위터 해시태그를 만들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홍익대 등 여러 미술대학에서 교수, 선배 작가들의 성폭력 의혹을 모은 사이트 개설도 이어졌다. 다음달 나오는 사진잡지 <보스톡> 창간호는 특집 일부로 사진계 성추행 실태에 대한 설문조사와 분석 결과를 소개할 예정이다. 이 사이트에 언급된 사례를 보면, 후배들에게 ‘너랑 자고 싶다’ ‘몸을 만지고 싶다’는 등 성희롱을 일삼거나 몸 더듬기, 강제 입맞춤 같은 성추행을 하고 누드모델이 돼줄 것을 사실상 강요했다는 등의 증언으로 가득하다.
여성 미술인들은 소장 작가들을 전시에 연줄로 소개하면서 일종의 소권력자 노릇을 하게 된 교수, 선배 작가, 기획자들이 사석에서 성추행 ‘갑질’을 하는 게 만성화한 고질이었다고 전한다. 폐습을 반드시 털고 가야 할 계기가 마련됐다는 반응들이다. 온라인 담론에 능숙하며 남성 미술인들의 성적 괴롭힘에 선배 여성세대보다 훨씬 민감한 20~30대 여성 미술인들의 세대적 특성이 반영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반면, 뒷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던 관장급이나 중견 기획자들은 거의 거론되지 않아, 무력감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있다. 미술계 한 여성 중견기획자는 “오래전부터 술자리에서 피해야 할 남성 미술인들의 이름이 여성 미술인들 사이에 다수 떠돌았는데, 거론된 사례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며 “사석에서 후배 여성 미술인들에게 막말을 하거나 노리개처럼 대해도 된다는 습관이 관행처럼 뿌리 깊게 박힌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계_성폭력_가만 있으라?
공연계도 ‘#공연계_내_성폭력’ 계정이 생기긴 했지만 표면화하지는 않은 상태다. 국립무용단장을 지낸 국수호 안무가가 1999년 남자 제자를 성추행한 혐의 등으로 실형 선고를 받은 바 있지만, ‘갑 중의 갑’들의 성폭력 소문이 떠도는 정도다. 공연계 한 관계자는 “위계관계에 의한 성폭력의 경우, 피해를 폭로했다가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선뜻 드러내기를 꺼린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후폭풍을 우려하는 시각도 적지 않다. 명예훼손 공방으로 이어지면 자칫 논란의 본질이 가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트위터에 성폭력 가해자로 실명 지목돼 사과문까지 냈던 젊은 미술 작가 ㄱ씨(가명)의 경우, 피해자 쪽에서 착오를 인정해 사과문을 내리고 실명을 지우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앞서 사죄문을 냈던 함영준씨도 언론사 쪽에 “일부 피해자가 속옷에 손을 넣었다고 주장한 내용은 완전한 허위”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가해자로 지목된 시인·소설가들도 심각한 추행이나 성폭행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례가 여럿이다.
문제는 ‘해시태그 성폭력 말하기’를 둘러싸고 피해를 호소하는 여성들을 ‘걸레’라며 폭언하거나 발언을 위축시키려는 목소리도 만만찮다는 것이다. 김이듬 시인은 25일 페이스북을 통해 “(문단의 성폭력 문제에) 침묵하는 게 낫다”는 조언을 들었다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진정한 문학을 해야 한다’고 하는데 ‘일상’은 뭐며 ‘진정한 문학’은 뭘까?”라고 질문했다. 황인찬 시인은 27일 트위터를 통해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작가들을 향해 “법적 대응을 멈추고 반성할 시간을 갖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계_성폭력_말하기’ 기록 저장 운동
최근엔 문화예술계의 성폭력·성차별·여성혐오 표현 사례를 모으는 아카이빙 활동이나 모니터링 창구를 제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가해자들의 처벌과 활동 규제뿐 아니라, 구조를 드러내는 기록·저장 활동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성학 연구자 권김현영씨는 “해시태그 말하기가 이제 개별 가해자에 대한 응징이 아니라 ‘○○계’ 내부의 여성혐오, 성차별적 문화, 강간문화 등을 보기 시작한 집단 지식의 장이 되었다”고 말했다. “‘미러링’의 단계를 지나 기록·저장하는 단계가 구조를 보여주는 훨씬 더 중요한 운동”이라는 것이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존경해 마지않는 스승이나 유명 작가 등이 행한 성폭력이라는 점에서 활동을 시작하려던 자신의 미래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만취 등을 이유로 자책하며 가만히 있던 여성들이 이제 막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인데, 이를 명예훼손이라며 대응하기보다 먼저 철저히 반성하고 각계도 재발 방지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현재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인문한국(HK) 교수는 “비슷한 피해가 거듭 재발되는 상황을 바꾸려면 고발로서 해시태그 말하기, 혐오발언 되받아치기 같은 당사자의 능력을 키우고 정치적·문화적인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노형석 손준현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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