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초기 백제시대의 도읍지 한성의 일부분으로 짐작되는 서울 방이동 몽촌토성(국가사적)에서 ‘관’(官)자가 새겨진 당대의 토기 조각과 최대폭 13m에 달하는 대형 포장도로 등이 발견됐다. 몽촌토성이 초기 백제 왕성터로 유력한 부근 풍납토성과 함께 도성 구실을 했을 가능성을 높여주는 조사 결과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한성백제박물관은 몽촌토성(사적 297호) 북문터 일대를 최근 발굴한 결과 문터 안에서 삼국시대의 대형 포장도로 5곳, 문터 바깥에서는 삼국시대 도로 1곳과 통일신라 시대 도로, 수레바퀴·사람·소의 발자국 흔적 등이 조밀하게 남아있는 생활 유적 등을 확인했다고 14일 발표했다.
1호 도로터와 주변 유적의 전경. 공중에서 본 사진이다.
북문터 안쪽에서 드러난 5곳의 삼국시대 도로는 격자상으로 구획한 뒤 잡석, 점토, 풍화토를 넣고 다진 포장도로다.
특히 북문터를 통과하는 길과 바로 연결되는 1호 도로는 백제가 처음 폭 9,7m의 중심도로를 조성한 뒤 그 옆으로 폭 2.7m 정도의 도로를 덧대어 확장한 중층도로이며 최대 폭 13m에 이른다. 중심도로의 북쪽 도랑을 사이에 두고 또다른 도로와 도랑이 나란이 이어지는 흔적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1개의 도로가 3개의 노면으로 확장된 ‘1로3도’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조사단 쪽은 “이 토성을 후대에 점령한 고구려인들이 백제시대 썼던 하층도로와 중층도로를 증개축해 썼던 것으로 보인다. 시기별로 모두 세 차례에 걸쳐 계속 축조된 사실이 발굴 결과 확인된다”고 설명했다.
1호 도로에 덧붙여 고구려인들이 옆으로 확장시킨 도로를 보면, 북문터 안 쪽에서 오늘날의 회전교차로처럼 돌아가는 특이한 모양새도 나타난다. 성 안팎으로 사람과 물류의 출입을 원활히 하기위한 의도로 추정되는데, 이런 얼개와 규모의 도로는 국내 고대도성유적에서 처음 확인되는 것이라고 조사단 쪽은 밝혔다. 또 1호 도로는 북문터 바깥으로 이어지다 북서쪽의 풍납토성(북성)쪽으로 굽어지는 얼개를 띠고 있어 두 성을 연결하는 주요 통로였던 것으로 보고있다.
유적에서 나온 관(官)자명 토기조각. 목짧고 아가리 곧은 백제 특유의 토기항아리인 직구단경호의 어깨 부분이다.
유물로는 ‘관’(官)이란 글자가 새겨진 토기 조각이 나왔다. 목이 짧고 아가리가 곧은 4~5세기 백제 중심부의 대표적 토기인 직구단경호 항아리의 어깨 부분에 해당된다. ‘관’(官)자명 토기는 풍납동토성에서 출토된 바 있는 ‘대부’(大夫)명 토기와 같은 기종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아울러 후대 고구려인들이 만든 것으로 보이는 도로와 흙을 다진 땅(성토대지), 구덩이 유구 등도 확인돼 5세기 장수왕의 백제 정벌 뒤 고구려가 몽촌토성 일대를 계속 활용했다는 구체적인 근거들이 확보됐다. 몽촌토성에서는 1980년대 다수의 고구려 토기들이 출토된 이래로 고구려가 성을 점령한 뒤 계속 활용했다는 설이 기존의 철군설에 맞서 제기돼 왔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한성백제박물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