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m의 휘어진 블록담과 대나무들에 둘러싸여 깔끔하게 리모델링된 서울 구로구 오류2동주민센터 뒤편의 동네도서관과 마당.
동네도서관으로 리모델링되기 전 오류2동주민센터 뒤편의 빈집과 공터의 모습. 폐기물, 자재 등이 널려 있었다.
“건물이 좁아요. 새로 디자인할 공간이 전혀 없을 겁니다.”
막막했다. 낡은 건물의 때깔을 바꾸려고 왔는데 작업할 공간 자체가 없다니. 올해 2월말 서울 구로구 오류2동 주민센터를 찾은 건축가 김원진(38)씨는 동장과 직원들의 말에 맥이 빠졌다. 인구 14만을 관할하는 센터는 1층 민원실, 2층 마을문고, 3층 업무공간이 촘촘히 박힌 27년 묵은 콘크리트 건물. 새로 들어온 사회복지공무원 7~8명의 업무공간을 새로 들여야 하는데, 건물 자체만으론 공간 견적이 안 나왔다. 한숨 쉬며 창밖을 보던 건축가의 눈에 뒤편의 공터가 확 들어왔다. 자재와 폐기물들이 널려 있었다.
“저 공터는 뭐죠?” “몇년 전 집이 있다가 불탄 뒤 버려진 땅이에요. 도로와도 단절돼 집도 못 짓는 맹지입니다.”
건축가는 “한번 보자”면서 부리나케 내려가 뒤편 공간을 살펴봤다. 35평의 길쭉한 대지, 바로 옆에는 수년 전부터 빈 30여평 되는 폐가도 있었다. 머릿속에 퍼뜩 착상이 떠올랐다. ‘그래, 센터 2층 도서관을 여기로 옮기고 공터는 마당으로 만들자!’
7월 오류2동센터 뒤편에 대나무숲 덮인 블록담을 이고 들어선 오류2동 동네도서관은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쓰레기 널린 맹지와 폐가를 도서관과 마당터로 거저 내달라는 건축가의 당돌한 제안을 동장과 집 소유주는 놀랍게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덕분에 변두리 후미진 골목의 버려진 땅과 집은 은은한 대나무숲이 주위를 감싸는 책의 전당으로 탈바꿈했다. 서울시 지원액은 5000만원에 불과했지만, 구로구 쪽에서 조경 비용을 부담해 구멍 뚫린 블록재로 구성된 50m의 담장과 대나무 정원을 안은 도서관이 실현된 것이다.
건축가는 설계 전략으로 자리터를 바꾸는 ‘스위치’ 개념을 구상했다. 센터 2층 문고를 뒤편 폐가로 옮기고 원래 자리에 복지공무원들의 업무공간을 들였다. 센터 리모델링 대신 뒤편에 별개의 건축 프로젝트를 벌여 주민들이 쉬고 공동체 활동을 벌일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담은 있지만, 문이 없고 블록재 구멍 속으로 각기 다른 주변 풍경이 보이는 이 건축 프로젝트에 대한 주민 반응은 호평 일색. 쓰레기투성이여서 통행을 꺼리던 곳에 주민들이 서로 자원봉사하겠다면서 도서관 활동이 자율적으로 꾸려지기 시작했다. 현재는 20명 넘는 자원봉사자들이 시설 운영을 나눠 맡고 있다. 김 건축가는 “말도 안 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라고 했다. “돈을 번 건 별로 없지만, 현장의 공무원, 주민들과의 공공건축에 대해 숨김없이 소통할 수 있었다는 체험 자체가 큰 자산이 됐다”는 말이었다.
오류2동 동네도서관과 마당, 블록담을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
동사무소를 고치려다 별도 건축 프로젝트까지 확장된 오류2동센터는 올해 시가 13개 구 203개 동에서 건축가 180여명과 함께 벌인 ‘찾아가는 동주민센터 공간개선’ 사업(찾동사업)의 성과 중 일부다. 다른 지역에도 독특한 리모델링 사례들이 상당수 눈에 띈다. 김진숙 건축가가 맡은 서울 마포구 공덕동주민센터는 경내 오랜 향나무를 나무데크로 둘러싸고 건물 앞창을 전면이 열리는 폴딩도어로 바꿔 쉼터는 물론 민원 대기공간을 넓히는 효과를 냈다. 독일 건축가 슈바이처가 작업한 상계5동 사무소는 건물 앞 주차장을 관객석 같은 계단 공간으로 바꾸고 작은 출입문도 넓게 터서 소극장 같은 문화마당을 만들었다. 뒷벽을 허물어 뒤쪽 쌈지공원과 잇대고 연결로를 갤러리처럼 꾸민 공릉2동센터, 업무 시간 지나면 민원대 앞으로 차양문을 치고 그 앞공간을 영화관처럼 탈바꿈시키는 대림2동센터의 시도도 돋보인다.
건물 앞 향나무 고목을 나무데크로 감싸 주민 쉼터 겸 야외 민원대기실로 만든 서울 마포구 공덕동주민센터 들머리 모습.
지난해에 이어 두번째로 진행된 이번 사업은 ‘국내에서 사상 처음 건축가 집단의 전문성이 사회적 작업을 행한 것’이라는 총괄계획자(MP) 김인철 건축가의 언급처럼, 딱딱한 기존 행정단위 공간에 건축적 상상력으로 문화공간의 옷을 입힌 선구적 시도들이다. 주민들의 공간 조건과 거주 내력이 다른 각각의 지역 센터마다 색다른 특색을 드러내는 리모델링이 이뤄져 건축가·주민·공무원의 문화 협치(거버넌스) 모델을 만들어냈다는 평가가 나온다. 김인철 건축가와 함께 올해 사업 총괄계획자로 일한 신춘규 건축가는 “단순한 내부 인테리어를 넘어 도시재생 측면에서 동사무소와 외부 도시공간과의 접목을 모색한 작업들이 많았다”며 “일부 마찰도 있었지만, 소통하는 건축의 힘을 시민들과 공유할 수 있었다는 점이 가장 뿌듯한 결실일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서울시는 내년에도 100여개 동에서 건축가들과 ‘찾동사업’을 지속할 방침이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김원진 건축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