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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광장·골목이 건물 안에…우리 동네 ‘기억의 도서관’

등록 2017-01-15 15:24수정 2017-01-15 19:58

[100℃] 건축의 힘 ‘구산동도서관마을'
연립주택 세 채와 골목길을 품은 구산동도서관마을. 5층까지 뚫린 ‘마을광장’은 옛 기억을 보전한 대표적인 공간이다. 사진은 지난 11일 열린, 초등생을 위한 ‘겨울방학 어린이와 함께하는 우주여행’.
연립주택 세 채와 골목길을 품은 구산동도서관마을. 5층까지 뚫린 ‘마을광장’은 옛 기억을 보전한 대표적인 공간이다. 사진은 지난 11일 열린, 초등생을 위한 ‘겨울방학 어린이와 함께하는 우주여행’.

책을 수장하고 책을 읽는 데 더해 기억을 저장하고 이를 공유하는 도서관이 있다. 서울 은평구 구산동도서관마을(연서로 13길 29-23)이 그렇다. 도서관 안에 옛 마을과 골목이 그대로 살아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옛 마을 주민이 사서가 되어 책을 빌려주고 손님을 맞는다. 이들은 사서와 손님 이전에 같은 동네 이웃이어서 누구 엄마, 누구의 자녀로서 눈인사하고 적절한 책을 권하고 기꺼이 받아 읽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2015년 11월 개관한 구산동도서관마을은 겉모양부터 기이하다. 통상적인 사각형이 아니라 들쑥날쑥 다각형이며 벽돌(노랑, 흰색), 화강암(잿빛) 외벽이 불규칙하게 이어진 슬라브형이다. 여기에 팔자지붕 금속피 건물이 박힌 듯이 붙어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벽돌연립 2채, 화강암 마감 연립 1채와 재래식 기와집 1채로 된 마을 그대로를 골목길과 함께 콘크리트 커튼월 방식으로 품고, 여기에 아연판 마감 건물을 덧대어 지었기 때문이다. ‘도서관마을’ 이름도 그래서 붙였다. 도서관은 1972년, 1994~5년, 2002년, 2015년 양식의 컨템퍼러리 건물 보전과 전시를 겸한 셈이다. 주변의 연립들 사이에 오래전부터 있었던 듯 자연스럽다.

건물은 도시재생프로그램 모범사례로 꼽혀 개관 이듬해 ‘대한민국 공공건축상’ 대상과 ‘서울시 건축상’ 대상을 받았다.

“건축주인 은평구가 상대적으로 가난하기 때문에 가능했어요. 역설적이죠. 강남에서라면 어림없는 일입니다. 거기엔 애초 이런 연립이 없을뿐더러 있다 해도 모두 부수고 새로 지었을 겁니다.” 독특한 방식의 리모델링을 설계한 디자인그룹오즈 건축사사무소 최재원 소장의 말이다.

공사 전 모습. 최재원 제공
공사 전 모습. 최재원 제공

연립주택 세 채와 골목길을 품은 구산동도서관마을.
연립주택 세 채와 골목길을 품은 구산동도서관마을.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책 숲 사이에 마을의 기억이 오롯이 살아 있음을 체감할 수 있다. 5층까지 뻥 뚫린 ‘마을광장’은 마을 앞 골목길. 공중전화 부스가 있고 책이 꽂힌 담벼락이 있다. 계단과 짧은 통로는 건물과 건물 사잇길이 틀림없다. 마을광장 행사가 내려다보이는 발코니는 벽돌연립의 베란다였음이 분명하고, 여학생이 고독을 씹는 뻐꾸기 창은 빗물 자국이 데데한 것이 이태 전에 비가 내렸음을 말해준다.

“골목의 반을 갈라 옛 건물 층고에 맞춰 주 통로 겸 서가용 공간을 만들어 넣었어요. 연립이 본래 주거용이고 오래된 것도 있어 책 무게를 못 견뎌 주저앉을지도 모르잖아요. 또 연립 두 채를 관통해 제2 통로를 내어 방과 방을 연결했어요. 층고가 다른 건물을 잇느라 고생했어요. 각각 다른 업체가 다른 때에 지은 탓이죠.” 바닥을 보니 이음 부분이 경사로, 또는 두어개 계단으로 되어 있다. 주 통로 양쪽으로 책꽂이가 즐비하고, 제2 통로 양쪽 50여개 방마다 사람들이 독서 삼매경이다. 입구의 안내데스크는 재래식 한옥 모양이다. 리모델링 공사 중 허물어져 아쉽게도 짝퉁이 됐다.

“이용자들이 무척 편안해해요. 자기만의 공간을 원하는 어린이와 청소년이 특히 좋아하죠. 제 방에서 공부하는 느낌이 드나 봐요.” 신남희 관장은 용도에 따라 확 트인 여느 도서관의 사무형 공간과 달리 익숙한 층고에 아기자기한 공간들이 들어선 것은 서민이 거주하던 20평 안팎 연립주택의 내부구조를 그대로 살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콘텐츠도 별스럽다. 어린이, 청소년용 책이 유독 많고 만화도서관이 별도로 꾸려져 있다. 마을자료실도 특이하다. 모두 은평구민의 요구를 반영한 결과다. 책을 모두 사서 읽기에 형편이 넉넉지 않고, 읽고 난 책들을 모두 보관할 공간이 없는 주민들한테 맞춤하다. 초등 5학년 아이를 둔 오기윤씨는 일주일에 한 차례 도서관에 들러 어린이용 단행본 15권을 안고 간다.

“아이가 한글을 깨치면서 도서비를 감당할 수 없었어요. 도서관이 생겨 비로소 숨통이 틔었죠. 두고 보는 전집이 책꽂이 가득이고요, 아이 아빠의 두꺼운 책이 많아 집안이 빠듯하거든요.”

3층 청소년도서실 자원봉사자인 동구마케팅고 1년 박지영양. 도서대출과 정리를 돕고 동아리 활동과 도서관 행사를 보조한다. 중고교생 30여명으로 구성된 청소년도서운영위원을 겸했다. 두 달에 한 차례 방학, 크리스마스 등 시의에 맞춰 ‘이달의 도서’를 선정해 소개한다. 직업인 인터뷰, 박물관·도서관 탐방기사를 써 50쪽 안팎 잡지 <청화>를 만들기도 했다. 예일여중 2학년 때부터 책을 가까이했으니 도서관과 더불어 성장한 셈이라고 했다.

20명 사서 중 절반이 주민이다. 한탁영 문화행정팀장도 그 가운데 하나다. 문헌정보학과를 나온 학사 사서가 도서 분류와 등록을 하고, 주민 사서는 대출창구, 문화활동 등 주민 접촉을 주로 담당한다.

“같은 동네에 살아 이용자 얼굴을 거의 알아요. 누구네 아들, 누구네 딸이라는 것 외에 현재 형편을 짐작하죠. 적절한 책을 추천하기도 해요.” 한 팀장은 일과시간 중에 밖에 나가면 이웃들이 “이 시간에 왜 여기에 있느냐”며 근태관리까지 한다며 웃었다.

마을 사람 모이는 도서관 지으려
서울시 주민참여예산 65억 따내
연립주택-기와집 이어붙여 건축

서가 사이 옛모습 오롯이 남아
담벼락서 책 꺼내 골목길서 읽고
5층까지 뚫린 광장선 문화행사

사서·이용자 모두 친근한 이웃
청소년 운영위원들 잡지 발간도
“지식 골고루 나누는 도서관 될 것”

도서관이 이처럼 주민·생활 밀착형인 데는 까닭이 있다. 독서모임을 중심으로 한 지역문화활동의 뿌리를 이식했기 때문이다.

출발점은 대조동 꿈나무어린이도서관이다. 2002~2003년 전국적으로 작은도서관 붐이 일 무렵이다. 교육열이 높은 이곳 주민들이 구청에 청원해 주민센터 3층에 방 한 칸을 빌려 도서관으로 만들었다. 여기저기서 책을 기증받고 열혈 주부 10여명이 자원해 번갈아 도서관을 지키며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주변 어린이집과 중학교 동아리와 연계해 ‘대추마을 문화제’를 열고, 다문화여성과 그 자녀들을 위한 행사도 추진했다. 열의가 커갈수록 공간이 좁아졌다. 2006년 주민센터 옆, 파출소였던 건물을 고쳐 옮겼다. 또 좁아졌다. 주민들은 방송사에서 하는 ‘기적의 도서관’에 응모하기도 하고, 옛 구산동 주민센터건물을 도서관 전용으로 쓰게 해달라고 연명으로 청원했다. 이들의 극성스러움은 구의회를 움직였다. 2008년에 현재의 건물을 구입할 예산을 확보해줬다. 추후에 어찌어찌 도서관을 꾸려주겠다며. 그로부터 4년 뒤인 2012년 기회가 왔다. 서울시에 주민참여예산 제도가 생긴 것. 구청과 합동작전으로 시비, 국비 65억원을 타냈다. 10여년 꿈에 그리던 도서관을 짓게 된 것이다.

“아이들에게 소리 내어 책을 읽어주어도 눈치 보지 않는, 엄마들이 도서관에 모여 책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깔깔거리며 만화책을 보는, 악기도 연주하고 영화도 보는, 코흘리개 아이들부터 어르신까지 마을 사람들이 모두 만나고 함께하는 도서관.”

최재원 건축가는 주민들 의사를 집약한 보고서와 도서관 부지의 연립들을 보고 난감함과 더불어 도전의식이 생기더라고 했다. 주민들은 기억을 보존하기를 원했고 구청은 건축비 절감을 위해 기존 주택을 재활용해주기를 요구했다.

“연립 3동과 재래식 한옥을 외부 브리지로 연결하는 게 일반적이죠. 그렇게 하면 공사가 편하기는 하지만 주민들 열의에 못 미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건축가로서 자존심을 보태기로 했어요.” 그렇게 해서 선택한 것이 커튼월로 기존 건물을 감싸는 현재의 도서관이다. 건축비를 신축에 비해 10% 절감했으나 노력봉사를 고려하면 자신은 손해라고 했다.

“힘들지만 즐거운 경험이었어요. 기존 건물들을 하나로 묶어내면서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재미가 쏠쏠했어요. 무엇보다 추상적인 요구를 건축적으로 구현한 게 가장 큰 보람입니다.” 그는 “부수고 새로 짓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걸 입증하는 사례가 되어 기쁘다”며 “훗날 주변 건물들이 재개발돼 헐리면 도서관이 서민주택인 연립의 모습을 보존하는 기념관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대구에서 30여년 도서관운동을 해오다 석 달 전에 합류한 신 관장의 꿈은 야무지다.

“정보와 지식의 혜택은 골고루 누려야 합니다. 도서관이 시민생활에 뿌리내려 소외계층을 보듬어야 하죠. 우리 도서관마을이 그 역할을 해낼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오게 만들고 아이들이 독립적인 주체가 되도록 말이죠.”

글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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