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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위풍당당 중신상’…불탔던 인조 부친 원종 초상화 복원

등록 2017-01-25 16:41수정 2017-01-25 21:41

1954년 불탄 그림 두조각 집요한 연구 끝에 합체
국립고궁박물관, 복원 모사 과정 책으로 펴내
불탄 채 남은 두쪽의 원종 어진 원본을 2015년 디지털 합성해 온전한 그림으로 만든 복원모사도.
불탄 채 남은 두쪽의 원종 어진 원본을 2015년 디지털 합성해 온전한 그림으로 만든 복원모사도.
지난해 9월부터 서울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 2층 ‘조선의 국왕실’에는 지금껏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 임금 초상(어진) 1점이 선보이고 있다. 17세기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재위 1623~1649)의 아버지 원종(1580~1619)의 초상이다. 얼굴 살집이 두툼하고 치켜오른 눈썹, 몸체의 명확한 골격 등이 위풍당당한 중신상이다. 생전 왕자였지만, 사후 아들이 왕으로 떠받들면서 어진이 그려진 것이다.

원종은 광해군처럼 선조의 서자였다. 좌찬성 구사맹의 딸(훗날 인헌왕후로 추존)과 혼인해 아들 넷을 낳았는데, 둘째인 능양군이 곧 인조다. 초상의 당당한 호남형 풍모와 달리 그는 한맺힌 인생을 살았다. 평생 자신을 꺼리는 배다른 형 광해군의 눈치를 보며 몸을 사려야 했다. 막내아들 능창군이 역모로 죽은 뒤로는 술로 소일하다 병에 걸려 39살에 숨졌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성품이 포악하고 행동이 방탕해 손가락질 받았다”는 평가와 “해가 뜨면 긴 밤 무사히 지낸 것을 알겠고 날이 저물면 오늘이 다행히 지나간 것을 알겠다. 오직 바라는 것은 일찍… 죽어 지하의 선왕을 따라가는 것일 뿐”이라고 한탄했다는 대목도 보인다. 권력에서 소외된 울분 등을 가누지 못해 허물어진 왕족의 삶이 풍채 좋은 초상 속에 숨어 있는 셈이다.

1872년 그려진 원종 어진. 1954년 화재로 불타 정면 기준으로 얼굴을 포함한 왼쪽 부분이 사라졌다.
1872년 그려진 원종 어진. 1954년 화재로 불타 정면 기준으로 얼굴을 포함한 왼쪽 부분이 사라졌다.
이 초상이 복원되기까지의 착잡한 내력이 최근 박물관에서 펴낸 자료집 <왕실문화유산 보존연구: 원종 어진 보존처리 및 모사도 제작>을 통해 드러났다. 이 자료집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수도 부산에 다른 어진들과 함께 옮겨진 뒤 1954년 화재로 불타 두쪽의 조각그림으로 남았다가 2015년에야 디지털 복원으로 합체되어 온전한 모습을 찾은 원종 어진의 복원 과정을 담고 있다.

두쪽의 불탄 원본 중 용안(얼굴)이 남은 한쪽은 1935년 당대 최고의 채색화가 이당 김은호가 전래 도상을 바탕으로 그린 것이다. 표제가 없어 공신 초상으로만 알고 소장해왔다가 2011년 임현우씨의 논문을 통해 이당이 그린 원종 어진으로 확인됐다. 다른 한쪽은 1872년 왕실 화가들이 그린 것이다. 이당의 초상보다 전통 도상에 가깝고 원종의 표제도 붙어 있으나, 얼굴을 포함한 왼쪽 부분이 불타 없어져버렸다. 박물관 쪽이 서울대 미술품보존연구센터 등과 손잡고 2015년 두 원본을 합쳐 원종 어진 복원 작업에 착수한 배경이다.

1935년 화가 이당 김은호가 당대 전해진 원종의 옛 어진을 바탕으로 그린 초상화. 1872년본과 마찬가지로 1954년 화재로 불타 정면 기준 오른쪽 몸체 부분이 없어졌다.
1935년 화가 이당 김은호가 당대 전해진 원종의 옛 어진을 바탕으로 그린 초상화. 1872년본과 마찬가지로 1954년 화재로 불타 정면 기준 오른쪽 몸체 부분이 없어졌다.
두 그림의 아귀를 맞추기는 쉽지 않았다. 이당이 그린 초상은 정교한 근대 사실주의 화풍이다. 전통 어진의 도식적 복식과 얼굴을 변형해 그려 1872년본과 색감과 크기, 복식 등이 확연히 달랐다. 연구진은 고민하다가 17세기 원종 초상과 비슷한 윤효전, 임장, 이사전 등의 당대 중신 초상 등을 비교 검토해 힌트를 얻었다. 단령, 흉배, 서단 등 당대 관료 복식 얼개 등에 대한 심층분석을 거쳐 얼굴은 이당의 초상에서 따오고, 복식과 앉은 의자, 아래 배경인 채전(카펫) 등은 1872년본을 합성하는 방식으로 복원 초상을 만들어냈다. 박물관 보존과학팀의 이현주 연구사는 “사진과 사료 등이 꽤 많이 남은 태조, 고종, 순종의 어진과 달리 원종 어진은 남은 단서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사료를 추적 연구해 복원한 첫 성과”라고 말했다.

조선 어진은 창덕궁, 경운궁 등에 봉안됐다가 일제강점기 상당수가 사라졌고, 그나마 남은 48점도 한국전쟁 직후 부산에서 화재로 대부분 소실됐다. 현재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작품은 태조, 세조, 영조, 철종, 순종, 원종의 어진뿐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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