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이름난 글씨들을 모은 위창 오세창의 노작 <근역서휘>. 이번에 서울대박물관에서 사회평론출판사와 손잡고 4권짜리 거질로 한정판 영인본을 펴냈다.
미술사는 명작, 명품 말고도 연구의 잣대가 되는 자료 모음과 통사를 다룬 개설서가 필수적인 학문이다. 새해를 맞아 한국, 중국 미술사 연구의 전범으로 꼽힐 만한 대작들이 연달아 세상에 나와 애호가들을 설레게 한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이었고 한국 서화 사상 최고의 감식안으로 꼽히는 위창 오세창(1864~1953)이 1911~32년 심혈을 기울여 엮은 이 땅의 전통글씨 모음집 <근역서휘(槿域書彙)>의 영인본이 최근 서울대박물관에서 나왔다. 영인본이란 고문헌 원본 내용을 사진으로 촬영 복제하고 해설을 붙인 자료집을 말한다. 10년 이상의 준비작업 끝에 사회평론아카데미가 출판을 맡아 모습을 드러낸 이 영인본은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 조선시대를 거쳐 20세기 초중반까지 역대 중요 인물 1107명이 쓴 서간, 한시, 문집 등의 글씨 작품 1119점을 담고 있다. 서울대박물관이 소장해온 <근역서휘> 35책의 원본 필적들을 국배판보다 훨씬 큰 대형 판형의 도록으로 옮기고 국역문, 주석 등을 담은 별도의 해설서인 해제 1권까지 붙여 5권으로 정리한 것이다.
<근역서휘> 영인본 내용 가운데 충무공 이순신의 글씨를 다룬 부분. 위창 오세창이 약술한 충무공의 간단한 인적사항이 도판 오른쪽 위에 보인다.
<근역서휘>는 역시 위창이 1943년 편집해 성균관대박물관에서 기증받아 소장해온 <근묵(槿墨)>(1981년 영인본 출간)과 더불어 국내 옛 서첩을 대표하는 유물이다. 한국 서예사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를 지녔다고 평가되는 자료집이기도 하다. 위창이 일제강점 초기부터 점차 잊혀가던 선인들의 글씨를 수집·정리해 우리 문화의 전통을 보존·계승하고 각성하는 계기로 삼고자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위창은 <근역서휘>의 발문에서 옛 묵적이 쉽게 사라지는 것이 “강물이 흘러 한번 기울면 오늘을 쉽게 잃을 것”과 같아서 “지금 좀이 먹어 흩어지고 떨어져나간 것들을 취해서 일신하고 새로운 면목의 근묵이 나오게” 하여 “후대인들이 옛날 좋아하기를 지금과 같게 하였다”고 쓰고 있다.
<근역서휘> 원본은 1911년 위창이 직접 편집한 수책(首冊:머리책) 및 1~23책과, ‘재속’(再續, 전후책), ‘삼속’(三續, 1~3책), ‘사속’(四續, 1·2책), ‘오속’(五續, 1~4책)이란 이름 아래 1932년까지 증보(추가로 펴냄)한 자료집, 인명고(人名考) 2책을 합쳐 모두 37책으로 꾸려졌다. 증보된 자료집은, <근역서휘> 1~23책이 1920년대 친일 재력가 박영철(1869~1939)의 소장품이 된 뒤로 박영철이 위창의 도움을 받아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창의 표제와 서문 등이 들어 있는 수책과 수록 인물 내용을 담은 인명고를 빼고 순수한 글씨본 내용만 치면 34책이 된다. 신라시대의 김생, 최치원, 조선시대 말기의 문인 고람 전기까지 1107명의 글씨 작품이 등장하는데, 통일신라 2명, 고려 27명 외에는 대부분 조선시대 명필들이다. 마지막 자료집 ‘오속’에는 19~20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인물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여기에 조선 국왕 어필을 비롯해 중인·천민 작품 등에 이르기까지 계층별 시기별로 다채로운 필적들이 망라돼 있어 가히 한국 전통서예 1000년사의 보고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원래 소장자 박영철이 숨진 뒤인 1940년 그의 유언에 따라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에 기증됐으며, 해방 뒤 서울대박물관의 컬렉션 뼈대가 됐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지대하다.
박물관 쪽은 “2002년 특별전을 열어 서첩 일부를 공개했지만 극히 소략한 80여점만 내보여 <근역서휘> 전체 내용을 담은 영인본 발간은 국내 학계의 오랜 숙원이었다”며 “해동경사연구소를 비롯한 많은 기관과 개별 연구자들이 교열, 탈초(흘림 글자를 읽기 편한 정자체로 바꾸는 작업), 역주에 나서 10년여간 땀방울을 흘린 덕분에 큰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리린찬이 역작 <중국미술사>에서 중국 산수회화의 최고 걸작으로 소개한 북송시대 화가 범관의 대작 ‘계산행려도’. 끈기있게 한올 한올 바위의 질감을 묘사한 우점준 기법이 도드라진 명작으로 대만 고궁박물원을 대표하는 소장품이다.
중국 미술사 연구에 평생 몰두한 리린찬(1913~1999) 전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부원장이 30년간 집필했다는 600여쪽의 대작 <중국미술사>(장인용 옮김·다빈치)도 눈길을 사로잡는 저술이다. 중국 특유 회화양식인 고대 화상석(돌판 위에 장식·풍속 등을 새긴 그림)과 5세기 육조시대 대화가 고개지를 필두로 북송대 일가를 이룬 범관, 곽희의 대작 산수와 궁중 화조화, 청대 양주팔괴 따위의 전위적 흐름, 20세기 대가 치바이스, 리커란의 근대 생활화, 풍경화에 이르기까지 친근한 해설로 5000년 중국 미술사의 장강을 종횡무진한다.
2차 대전 뒤 영국이 브리티시뮤지엄에 소장한 고개지의 그림과 군함 중 하나를 선물로 줄 테니 택일하라고 중국에 제안했을 때 군함을 택한 우매한 결정,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의 왕실이 반출에 편한 작은 명품들만 팔아치워 결국 고궁박물원이 대작 중심 컬렉션으로 굳어진 내력 같은 재미있는 비화들도 책 곳곳에 버무려졌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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