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권한대행 제1차관을 비롯한 간부들이 23일 오후 정부세종청사 교육부 지하 브리핑실에서 문화계 블랙리스트 관련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고 있다. 발표에 앞서 그리고 발표 뒤 허리를 굽혀 사과를 했다. 세종/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습니다. 머리 숙여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1월23일 문화체육관광부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반성과 다짐의 말씀’ 중)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를 현장에서 실행한 책임을 지고 ‘대국민 사과’까지 한 문화체육관광부 누리집 첫 화면에서는 이 대국민 사과문을 찾을 수 없다. 반면, 블랙리스트를 부정하는 언론보도 해명은 주요 자리에 노출돼 있어 “문체부가 제대로 반성하고 있긴 한 것이냐”는 지적이 나온다. 문체부는 블랙리스트로 인해 전·현직 장·차관 4명이 구속된 상황이다.
문화체육관광부 누리집 ‘언론보도해명’ 코너에 올라와 있는 ‘블랙리스트’ 관련 해명 자료. 누리집 갈무리
문체부는 지난해 7월 이후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해 30여개의 언론보도 해명을 쏟아냈다. 3일 문체부의 언론보도 해명 자료를 살펴보면, 대부분 ‘영혼 없는 해명자료’다. 대부분 조윤선 전 장관 주장을 반복하는 수준이다.
이 가운데 블랙리스트와 직접 관련된 해명자료는 모두 7건. 출발은 지난해 11월7일 <한겨레>가 단독으로 보도한 “조윤선 장관이 블랙리스트 작성 주도” 기사에 대한 해명자료였다. 문체부는 이 자료에서 “조윤선 장관과 정관주 차관은 기사 내용이 명백한 오보이며, 이에 대한 언론중재위원회 정정 보도 청구를 포함한 법적 대응을 적극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고 ‘전달’했다. 12월26일 <에스비에스(SBS)>가 문체부 블랙리스트 실물을 입수해 보도하자 “오늘 공개된 블랙리스트는 조윤선 장관은 본 적도 없는 자료”라고 밝혔다. 조 전 장관은 얼마 뒤 국회에서 열린 ‘최순실 게이트’ 7차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와 국회의원들의 잇따른 압박성 질문에 “예술인들의 지원을 배제하는 그런 명단은 있었던 것으로 판단이 되고 있다”고 털어놨다. 이 자리에서 조 전 장관은 ‘블랙리스트’에 대한 보고를 “1월 초 문체부 예술국장으로부터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취임 직후인 지난해 9월 이미 블랙리스트 보고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에 관여한 혐의로 구속된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1월24일 오후 서울 강남구 대치동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 국정농단 사건 수사 특별검사팀’ 사무실로 소환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문체부 해명은 조 전 장관의 사의 표명 하루 전인 1월20일까지 이어졌다. 문체부는 이날 2개의 해명자료를 내고 “조윤선 장관은 ‘블랙리스트, 김기춘이 시켰다’는 자백을 한 적이 없고, 어버이연합을 동원하여 반세월호 집회를 열도록 한 적이 없다고 알려왔다” “조윤선 장관은 문체부 장관실 하드디스크 교체를 지시한 바가 없다”고 주장했다. 바로 다음날 조 전 장관은 ‘블랙리스트’ 작성에 관련한 혐의(직권남용 등)로 구속됐다.
문체부는 부처와 상관없는 장관의 사적인 의혹에 대해서도 대신 입장을 밝혔다. 지난해 12월28일 문체부는 “이혜훈 의원은 조윤선 장관이 최순실씨를 재벌 사모님들에게 직접 소개한 것처럼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 조 장관은 이 의원의 발언이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는 내용의 해명자료를 냈다.
“머리 숙여 사과한다”는 ‘대국민 사과문’ 역시 뜯어볼수록 부실투성이다. 사과문에는 ‘블랙리스트’ 대신 ‘공공지원에서 배제되는 예술인 명단’이라는 복잡한 명칭이 등장한다. 이리저리 말을 빙빙 돌리며 절대 ‘블랙리스트’를 입에 올리지 않았던 조 전 장관이 떠오르는 지점이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에 대한 내용도 빠져 있다. “특검 수사, 재판, 감사원 감사 등 절차가 종료되면”이라는 단서 때문이다. 사과문을 발표한 송수근 장관 직무대행이 ‘블랙리스트’ 의혹에서 자유롭지 않기도 하다.
문체부 누리집 메인 화면에 노출되지 않은 ‘대국민 사과문’을 찾기 위해선 알림 목록을 다음 장으로 넘겨야 한다. 누리집 갈무리
문체부 홍보 담당자는 대국민 사과문이 메인 화면에 노출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처음 기획조정실에서 사과문을 넘겨받을 때 따로 노출을 고려하진 않았다”고 말했다. 현재 사과문은 알림글 목록에서 시간 순으로 밀려 이를 찾기 위해선 다음 장으로 넘겨야 한다. 사상 초유의 ‘블랙리스트’ 사건을 다룬 사과문은 ‘문화가 있는 날 스케이트장 어린이·청소년 무료개방’ 같은 알림과 똑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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