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동백이 보고 싶어, 지난해 이른 봄 전남 강진 백련사를 찾아 그렸다.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돼 있는 백련사 동백나무숲은 3월이면 절정을 이룬다. 백련사 동백, 2016년 3월, 펜 & 수채, 26×18㎝
“스님, 혹시 성질 급한 동백이나 매화가 피었나요?”
“성질 급한 동백은 보이는 듯합니다. 매화는 아직이죠. 이제 움터서 한두 개 피려고 하긴 해요.”
“첫 매화 필 때 꼭 알려주세요! 내려가서 그리려고요.”
“네. 곧 필 듯합니다. 저도 매일 매화 봉오리 보며 노심초사한다는….”
전남 강진 백련사 주지 일담 스님에게 재촉 중이다. 하하. 입춘이 지나면 매화, 동백이 보고 싶어 몸살이 난다. 지난해 3월 초에도 백련사로 달려 내려가 동백과 매화를 그렸다. 장독대 옆에 고개 숙여 피고 있던 할미꽃도 함께. 겨울 몇 달 동안 꽃 없는 인왕산, 서촌 골목길을 지나다니는 게 너무 팍팍하다. 예전엔 이러지 않았는데. 꽃이 너무 그립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꽃을 그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속으로 꽃 그리는 화가들을 비웃기까지 했다. 세상에 그려야 할 의미 있는 주제와 풍경이 이렇게 많은데, 예쁘다는 이유로, 잘 팔리는 그림이라는 이유로, 꽃을 그리다니! 한심하기는! 하는 식이었다.
백련사 동백, 2016년 3월, 펜 & 수채, 25×10㎝
우연히 진달래꽃을 그리게 됐다. 이른 봄 산에서 잠깐 피었다 지는, 도시에서는 만나기 힘든 진달래꽃. 뒷산 진달래를 꺾어다가 진달래화전 부쳐 먹는 자리에 함께했다가, 홀린 듯 진달래꽃을 그렸다. 펜으로 그린 다음 수채 물감을 살짝 입혀보니 너무 고왔다. 진달래꽃을 그렸으니, 개나리꽃도 한번 그려볼까? 그럼 사과꽃도? 그렇게 시작해서 복숭아꽃, 배꽃, 자목련, 라일락, 민들레, 목단, 봉숭아, 감자꽃, 채송화, 해바라기, 옥잠화, 맨드라미…. 인왕산으로, 서촌 골목길로, 이웃집 마당으로… 꽃을 쫓아다니며 100개의 꽃그림을 그렸다. 2015년의 일이다.
그 이듬해부터, 내가 이상해졌다. 입춘만 지나면, 환청처럼 꽃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봄은 한참 멀었는데, 집 앞을 나서면 인왕산에 진달래꽃 몽우리가 영글고 있는 소리, 저 뒷골목 집 마당의 자목련이 거세게 땅속 물 빨아들이는 소리, 집 앞 공터 개나리가 노란 색깔을 만들어내는 소리가 들린다. 꽃을 전혀 볼 수 없는 겨울을 견디기 어려워, 1월이면 수선화 화분을 사서까지 그린다. 일찌감치 꽃이 피는 남쪽으로 자꾸 여행을 떠나고 싶다.
동네 꽃 지도가 훤히 보이면서
1년 내내 가슴이 두근댄다
꽃을 그려보기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저 귀퉁이 돌아서면 그때 그 강아지풀꽃이 또 피어 있을까? 뒷골목에는 과꽃이 피었을 텐데, 이제 옥잠화가 필 때가 다 되었는데, 저 꽃집 앞 맨드라미는 몸을 얼마나 더 붉혔을까? 인왕산에 소국이 필 때가 되었어…. 동네 꽃 지도가 훤히 보이면서 1년 내내 가슴이 두근댄다. 꽃을 그려보기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우리 동네에 이렇게 많은 꽃이, 피고 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꽃이라면 꽃집에서 파는 꽃이 전부인 줄 알았다.
왜 옛날부터 우리 선배 화가들이 매화를 많이 그렸는지 실감했다. 그 멋들어지게 꺾어지는 가지의 리듬이나, 아련한 꽃잎 빛깔이 매혹 그 자체다. 올해도 꼭 내려가 그려볼 참이다. 백련사 매화, 2016년 3월, 펜 & 수채, 18×26㎝
가슴에, 감성에, 주름살이 100배나 조글조글하게 잡힌 것 같은 느낌이랄까? 말하자면 머릿속 뇌의 주름살은 계속 문드러져 새로운 지식이 축적될 곳이 없어져가는 듯한데, 감성의 주름살은 늘어나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표면적이 엄청나게 넓어진, 그런 묘한 느낌이다. 꽃 때문에, 동네 꽃에 대한 느낌을 기억하는 내 가슴 때문에, 내 마음이 훨씬 황홀해졌다.
새끼손톱보다 작은 꽃이라도 맹렬하게, 전력을 다해, 엄청난 디테일을 갖추어 피어나는 꽃. 금방 시들어버릴 줄 알면서, 단 하루를 위해서도 최선을 다해 황홀한 아름다움을 갖추는 꽃. 꽃들은 그런 존재 방식으로 내게 이야기한다. 삶에 대해. 어릴 땐 뭔가 목표를 향해 전력을 다해 뛰면서 맹렬하게 살았는데, 나이가 들고 보니, 삶이라는 게, 목표라는 게, 허망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허망한 줄 알면서도 열심히 뛰는 것은 지치고 힘들어, 포기하고 싶다. 그럴 때 꽃을 기억한다. 찰나를 위해 피는 꽃. 그 찰나를 위해 최선을 다해 피는 꽃.
백련사 공양간 장독대 앞에 고개 숙여 핀 할미꽃. 서울 도심에선 찾아보기 힘든 꽃이다. 백련사 할미꽃, 펜 & 수채, 25×10㎝
사는 동네 꽃 1년 따라 그리기! 누구에게든 권해보고 싶다. 작은 스케치북 하나를 산다. 동네를 돌아다니며 마음에 드는 꽃을 골라 앞에 앉는다. 한참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연필로 그리고 싶은 부분을 살짝 그린 후, 펜으로 그린다. 물감도 살살 칠해 본다. 어느 동네이든 꽃은 필 테고, 꽃을 따라다니다 보면, 분명 감성의 주름살이 조글조글조글 늘어나는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될 게다. 앞으로 어떤 새로운 동네로 이사 가 살게 되더라도, 꼭 1년 동안 그 동네 피는 꽃 따라다니며 그리기부터 시작해볼 참이다. 매화가, 동백이, 이들이 활짝 열어젖힐 ‘봄’이 어느 때보다 더 기다려지는 아픈 시절이다.
▶ 김미경 27년간 직장생활을 하다, 쉰네살이 되던 2014년 전업 화가를 선언했다. 서촌 옥상과 길거리에서 동네 풍광을 펜으로 그려 먹고살고 있다.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지 않고, 스스로 성장해가는 화가다. 전시회 ‘서촌 오후 4시’(2015년)와 ‘서촌꽃밭’(2015년)을 열었다. 각박한 현실에서 꿈을 접고 사는 사람들에게, ‘지금 당장’ 꿈을 향해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다. 자신이 사는 동네를 그려낸 따뜻한 작품과 그 뒷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꿈을 향한 각자의 발걸음이 더 빨라질 듯싶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