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환 작가. 역사와 시공간에 대한 독특한 감수성과 다장르를 능숙하게 소화하는 기본기를 겸비한 실력파로 주목받아 왔다. 2007년 에르메스재단 미술상 수상 당시의 모습이다.
2014년 아트선재센터 개인전에서 처음 선보인 김성환 작가의 근작 퍼포먼스 비디오 <수박의 아들들>. 사춘기 소년들과 수박을 소재로 만든 이 영상물은 전시장을 무대 삼아 전시 만들기의 본질과 역학에 관해 질문을 제기하는 작품이다.
예술사의 성지 베네치아에서 두 작가는 어떤 이야기를 꺼내들까. 세계 미술계의 ‘올림픽’으로도 일컬어지는 격년제 국제미술제 이탈리아 베네치아 비엔날레(올해 5~11월)가 한국 미술가 두 사람을 본전시에 불러냈다. 부서진 도자기 조각들을 붙여 자식 낳듯 증식시키는 작업들로 알려진 중견작가 이수경(54)씨와 자신의 유년기와 국내외 공간 경험에 얽힌 감수성을 설치, 영상 등의 다장르 작업으로 풀어온 소장작가 김성환(43)씨다.
베네치아 비엔날레 하면 시내 자르디니 공원에서 한국관을 포함한 수십개 국가관이 펼치는 국가대표 작가들의 출품작 경쟁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전시총감독의 스타일과 감각이 단적으로 표출되는 무대는 공원 들머리 이탈리아관에서 감독이 선정한 각국 작가들이 전체 주제에 맞춰 선보이는 본전시다. 프랑스 퐁피두센터 선임 기획자 크리스틴 마셀이 총감독을 맡은 이번 비엔날레의 전체 주제는 ‘비바 아르테 비바’(예술 만세)다. 그가 초대한 두 한국 작가의 성향이나 개성도 다분히 유희적인 전시 주제와 맞물려 보인다. 특정한 유행이나 시장의 취향에 쏠리지 않고 자유로운 사고와 감수성을 드러내는 작업들에 줄곧 매진해온 이들이기 때문이다. 성찰의 깊이뿐 아니라 드로잉, 설치, 영상 등의 여러 세부 장르 작업에도 능통해 기본기 튼실한 실력파들로 인정받는다. 과거 독재 시절 자신들의 성장기 역사와 기억들을 작업 실마리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도 묘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2년 전 본전시에서 영상작가 임흥순씨가 은사자상을 수상했던 터라 국내 미술계의 기대 어린 시선까지 받게 된 두 사람. 요즘 전시 준비에 한창인 그들의 근황과 생각들을 들어봤다.
■ 그저 신난다, 즐겁다…문제는 제대로 완성하기! “기사님! 자재 그거는 여기에…아뇨 이쪽으로 놔주세요.”
지난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수화기로 들려오는 이수경 작가의 목소리는 다급하지만 생기와 열정으로 가득했다. 서울 부암동 작업실에 시간 단위로 들어오는 출품작의 재료와 도구들을 챙기고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다고 털어놨다. 주초엔 광주 스튜디오에 가서 작품 사진도 찍고 왔단다. 이제 작업 개념과 구상은 대략 정리됐고 본격적인 만들기 작업에 들어간 상태다. 그는 “그저 신나고 즐거울 뿐이다. 욕심을 너무 많이 부리고 벌여놔서 5월9일 개막 때까지 작품을 제대로 완성해 보여줄 수 있을지가 걱정”이라고 했다.
이수경 작가는 무의식적인 카오스 상태에서 명상과 몸놀림에 몰입하며 자기 치유의 작업들을 끄집어내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초기작인 <순간이동연습용그림>부터 명상하며 그리는 <불꽃변주>, 도자기 파편들을 접붙인 <번역된 도자기> 연작들에서 보이듯 몸의 감각을 중시하는 작가의 작업들은 쉴 새 없는 변모를 감행해왔다. 원래 양화를 전공했지만, 드로잉·회화뿐 아니라 설치, 영상, 3D 프린팅 등의 다양한 기법과 매체를 활용하면서 전생, 윤회, 자기위안 등의 개념을 풀어낸 다양한 평면, 입체작업들이 자식처럼 그의 곁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작가의 존재가 다른 세계로 이동하고 변신하는 경험, 그 과정을 다양한 조형으로 형상화하는 것이 도드라지는 그의 작업들은 특유의 따듯한 위로와 치유감을 공유하게 하는 미덕을 갖고 있다는 평가도 받는다.
“총감독 크리스틴이 2006년 광주 비엔날레 당시 청자 조각들을 짜깁기해 출품했던 제 작품들을 눈여겨봤대요. 지난해 4월 다른 일로 프랑스 파리에 갔다가 퐁피두센터에서 근작들을 보여드렸는데, 8월께 본전시 작가가 됐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베네치아라 특별한 감회가 있는 것은 아니고 새 작업을 하니 설레고 재미있다는 느낌이 들죠. 외줄 타는 것처럼 긴장된 감정도 느껴지고요.”
신작의 상세한 얼개를 언급할 순 없지만, 자신이 분신이라고 믿는 기발한 새 이미지를 즉흥적으로 찾고 구현해온 작업방식은 지속될 것이라고 한다. 2015년 남도 아트프로젝트 때 전남 해남, 강진 분교의 낡은 동상과 여러 고찰 등을 답사하며 받은 강렬한 영감이 반영된 신작들도 번역된 도자기 연작들과 함께 선보일 생각이다. 3월과 4월 두차례 준비작업을 위해 베네치아 현지로 갈 예정이라고 밝힌 그가 통화를 끊기 전 한마디 덧붙였다.
“남도에서 용도폐기된 분교의 낡은 이순신, 세종대왕, 이승복 동상 등에 왕관 씌우는 작업을 했어요. 사라져버린 군사 독재 시절 제 유년의 시공간이 함축된 대상물이죠. 그 떨어져나간 시절에 대한 사유가 베네치아를 비롯해 앞으로 제 작업을 이끄는 에너지가 될 것 같아요. 생각만 해도 설레요.”
2015년 대구미술관 전시 당시 자신의 대표작 ‘번역된 도자기’ 앞에 선 이수경 작가.
2015년 아뜰리에 에르메스 개인전 때 나온 이수경 작가의 근작 <모두 잠든: 서왕모>. 자신의 내면에서 상상한 도교신 서왕모의 편히 잠든 이미지를 3D 프린터로 뽑아낸 조형물이다.
■ 삶의 속도 제어하는 미술의 힘 “미술을 포함한 예술 공간은 삶의 속도를 제어할 수 있는 특이한 힘이 있는데도, 많은 사회에서 이 공간이 생활을 위한 도구로만 쓰이죠.”
미국 뉴욕에서 작업중인 김성환 작가는 전자우편 인터뷰에서 오늘날 예술의 현실에 대한 진중한 진단으로 운을 뗐다. 작가는 “한국의 블랙리스트도 예술공간을 생활의 위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묶어두려는 방침이라고 볼 수 있다”며 비엔날레 주제에 대한 나름의 성찰적인 해석으로 말을 이어갔다.
“주제어 일부인 ‘비바’가 살라는 뜻이에요. 예술도 여느 삶처럼 주체성과 유일성이 있는 존엄한 공간이라고 외치는 동시에 이 당연한 명제를 외칠 수밖에 없는 부조리한 현실을 짚는 듯합니다.”
작가는 “주제에 맞춰달라는 요구를 받진 않았지만, 제가 읽는 책이나 작업 과정을 어느 정도 관객에게 밝히길 바라는 게 좀 다른 점인 것 같다”며 “에너지와 많은 예산이 필요한 설치, 퍼포먼스 같은 작업을 만들어 보일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한다”고 소회를 털어놓았다.
김성환 작가는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원래 건축학을 전공하다 미국에 유학해 엠아이티에서 영상연구 석사를 마치고 네덜란드 레이크스아카데미 레지던시를 거치면서 서구 쪽에 먼저 알려졌다. 2007년 일제강점기 조선 수도 게이조(경성)의 기억을 재구성한 영상작품 <게이조의 여름 나날>로 에르메스재단 미술상을 받은 데 이어 2012년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 미술관이 지하 오일탱크를 개조해 차린 신관 ‘더 탱크스’ 개관전의 첫 작가로 초대되면서 유명해졌다. 유신과 5공의 독재와 개발시대 서울 압구정동 아파트촌에서 보낸 유년기의 공간 기억들을 바탕으로 셰익스피어 희극 <리어왕>의 서사구조를 녹여넣은 테이트모던 출품작 <템퍼 클레이>는 2014년 아트선재센터의 개인전에서도 상영돼 호평을 받았다. 우리 근현대사의 상처에 대한 깊은 통찰과 핍진하게 남은 자신의 개인적 역사를 주된 모티브로 삼아 펼쳐지는 사운드아트, 영상, 설치 등의 다장르 융합적인 작업들이 돋보인다. 난해함도 주지만, 한국만의 역사적 서사를 굳이 앞세우지 않으면서도 치밀한 매체 활용으로 역사에 대한 내면의 감수성을 강렬하게 전해주며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이 장점으로 비친다.
구상중인 본전시 출품작은 1950년대 미국 흑인들의 정체성 찾기에 몰두했던 제임스 볼드윈 같은 20세기 미국 흑인 문학대가들의 행로를 시 형식으로 담고 시공간에 표현한 작품들이 될 것 같다고 한다. “한 주제나 전략 아래 작업을 내기보다 내 주위를 움직이는 방식과 리듬을 관찰하고 묘사하다 변형시키면서 주제가 형성된다”고 밝힌 작가는 “편파적이고 호전적인 지금 국제 정세에서 보이지 않는 관용과 사랑의 존재를 조명한 작업들을 비엔날레가 옹호했으면 한다”는 바람도 내놓았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에르메스재단, 대구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