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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은 시민이요, 붓은 초였다 ‘광화문 미술 난장’

등록 2017-03-12 18:31수정 2017-03-14 00:03

‘광화문 미술행동’ 김준권 작가·김진하 기획자 ‘촛불미술 석 달’
‘뭔가 해야 한다’ 의기투합 작업실 나와 작가들과 기획, 현장 작업
“촛불시민과의 즐거운 소통 그 자체가 작품이었다”
시민과 함께 하는 그리기, 퍼포먼스, 사진 작업 시민호응 뜨거워
대중과 닫혀있던 미술의 일상성 회복 가능성 깨달아
탄핵 인용 다음날인 지난 11일 광화문 광장 바람찬미술관의 퍼포먼스 현장에서 마주한 광화문미술행동의 두 주역 김진하 기획자(왼쪽)와 김준권 판화가. 두 사람 사이로 박방영 작가가 흰 천 화폭에 봄꽃 피어오르는 나뭇가지를 시민들 앞에서 그리는 퍼포먼스를 진행하는 모습이 보인다.
탄핵 인용 다음날인 지난 11일 광화문 광장 바람찬미술관의 퍼포먼스 현장에서 마주한 광화문미술행동의 두 주역 김진하 기획자(왼쪽)와 김준권 판화가. 두 사람 사이로 박방영 작가가 흰 천 화폭에 봄꽃 피어오르는 나뭇가지를 시민들 앞에서 그리는 퍼포먼스를 진행하는 모습이 보인다.
신명나는 농악 선율을 타고 하얀 광목천 위로 붓질이 휙휙 지나간다. 일획 일획마다 힘찬 봄 가지가 뻗어 오르고 발그레한 꽃망울이 피어났다. 봄날 천지만물이 흐드러지게 자라난다는 ‘만화방창(萬化方暢)’의 세상. 사다리 타고 10m 넘는 화폭에 그림을 그리는 박방영 작가는 신이 났다. 구경하는 관객들도 그림과 음악의 율동을 보고 들으며 어우렁더우렁 노랫사위 춤사위가 절로 일어났다.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발표가 나온 다음날인 11일 낮 광화문 광장은 새봄 축제마당으로 변했다. 광장 북쪽 세종대왕상 뒤편 기둥조형물에 미술인들이 천을 얽어 치고 차린 ‘바람찬전시장’에도 봄기운은 가득했다. 대학생들의 농악을 배경으로 박방영 작가의 만화방창 그리기 퍼포먼스가 시민들 눈길을 붙잡았다. 까만 먹과 붉은 안료를 써서 대형 붓으로 일필휘지 휘두르는 작업은 그림과 타악이 어울리는 그림 마당놀이처럼 보였다.

‘이것이 나라다’라는 큰 제목 아래 진행된 현장 퍼포먼스엔 다른 두 작가도 동시다발적으로 참가했다. 기둥 안쪽 전시장에선 칡뫼 김구 작가가 새우떼가 박근혜 정부의 비리 덩어리를 뒤덮으며 몰려드는 한국화를 그렸고, 기둥 반대편 전시장에선 여태명 서예가가 큰 붓으로 ‘사드가고 평화오라’는 대형 글씨를 썼다. 야외전시공간 앞면엔 ‘헌법 제1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게 나라다!’라고 적은 현수막이 걸렸다. 동상 주위엔 작가들이 주문한 탄핵기념화환이 둘러싼 설치작업도 눈에 띈다.

“재미있죠? 작업실, 전시장에서만 볼 수 있던 미술현장이 즐거운 놀이판처럼 펼쳐지는 모습을 나라 안 제일 큰 광장에서 볼 수 있다니… 시민들이 촛불혁명으로 차려준 판이 있어 가능했지요.”

지난 석달간 이곳에서 ‘바람찬전시장’의 프로그램을 짜고 만들어온 ‘광화문미술행동’ 대표 김준권(60) 판화가와 기획자 김진하(56) 나무아트 대표는 흐뭇한 얼굴로 그들의 마지막 현장 프로그램을 지켜보았다. “이제 맘 졸이지 않고 광화문의 미술판을 즐길 수 있어 행복하다”고 한껏 웃었다.

지난 12월9일 두 사람이 촛불 광장에서 ‘우리도 미술로 뭔가 해봐야 한다’는 의지를 모아 다른 작가들과 함께 꾸린 ‘광화문미술행동’은 한국 현장미술운동의 역사에서 몇몇 이정표를 세웠다. 20회까지 1600만의 시민들을 불러 모은 촛불집회 과정에서 광화문 야외 전시장을 주무대로 14차례 전시를 통해 펼쳐진 퍼포먼스, 회화, 사진, 설치 작업들 중 작가가 직접 만든 원화는 하나도 없다. 출력된 작품들의 복제 이미지에 관객이 낙서, 글씨 등을 덧붙이며 갈무리되는 작업들은 전에 없던 미술현상을 만들어냈다. 80년대 민중미술가들이 시국현장이나 노동현장에서 공권력과 몸으로 부딪히며 표현했던 선전 작업과 달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현장 출력 이미지, 그리고 음악과 행위예술 등이 어우러진 다양한 공동작업으로 대중과의 교감에 집중하는 미술판을 이뤄낸 것이다.

매주 토요일 탄핵집회를 앞두고 오후 2시부터 연 전시 내용은 일주일 단위로 급박하게 꾸며져왔다. 김 작가와 김진하 기획자가 일주일 전 협의해 기본 기획방향과 콘텐츠를 짜고, 서로가 전국 각 작가들에게 연락한 뒤 이미지를 기증받아 확대출력해 내걸고 시민들의 그림과 낙서, 글씨, 자발적인 일부 작가들의 현장작업을 덧붙여 전시꼴을 완성했다. 작가들의 작품들은 전체 프로젝트의 재료이자 소재로서만 활용됐다.

광화문미술행동은 11월19~28일 나무화랑에서 30여명의 작가들이 참여해 열린 ‘병신무란/하야제’ 전시에서 비롯했다. 탄핵 전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짧은 기간 작업에 담아낸 것이 계기가 되어 국회 탄핵이 의결된 12월9일 김준권 작가를 비롯한 몇사람이 연락해 느슨한 조직을 꾸렸다. “진보 보수를 떠나 미술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해보자”는 뜻에서 김 판화가가 사비를 털고 김진하씨는 세부 기획을 도맡으며 에스엔에스 소통으로 진행하는 활동 얼개를 마련했다.

처음엔 뜬구름 잡기 같았다고 한다. 지난 12월 초 바닥에 길쭉한 화폭 천을 깔아놓고 시민과 작가가 탄핵을 촉구하는 그림과 낙서 등을 그리거나 적어넣은 뒤 집회장을 막은 경찰버스의 차벽에 붙이는 ‘차벽공략’ 프로젝트를 세차례 벌인 것이 시작이었다. 작가와 시민들의 다채로운 글씨, 그림들로 빽빽하게 채워진 최대 100m짜리 펼침막이 길게 차벽에 이어져 붙여졌다. 시민들의 호응이 뜨거워지자, 미술인행동은 서울시 협조를 얻어 4차 전시부터 세종대왕 동상 뒤편의 업적을 새긴 기둥들 사면에 천을 이어붙여 10여평 규모의 현장 작품마당을 만들었다. 민주화운동 원로인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두 사람을 ‘주어진 판을 뒤엎고 새 판 일구는 사람’이란 뜻의 ‘새뚝이’라고 부르면서 ‘바람찬전시장’이란 새 이름을 붙여주었다. ‘응답하라 1987, 한걸음더 2017’ ‘동녘이 밝아온다’ ‘역사, 광장민주주의’ 같은 인상적인 카피와 주제들이 잇따라 나왔고, 작가들도 스스로 광장으로 나와 십시일반 돈 내고 작업 설치를 도왔다. 작가 신학철씨의 ‘한국근대사’와 이흥덕씨의 ‘지하철 퍼레이드’ 같은 형상회화 수작들이 대형 천 위에 출력되어 시민들과 만났고, 광화문 예술인캠핑촌에서 노숙한 사진가 노순택씨, 광장 곳곳에 블랙리스트 면도날 등을 설치한 최병수 작가 등과의 연대전시도 성황리에 이어졌다.

“급하게 작업들을 고르다 보니, 참여 작가들과 조율하는 게 힘들었어요. 작가들은 본래 자기 작품이 돋보이는 것을 원하잖아요. 하지만, 작가들이 촛불미술의 공동체적 의미에 전적으로 동감해줘서 누구도 자기 작품 내세우지 않는 전시를 만들 수 있었어요.”(김준권)

김진하 기획자는 배치를 바꾸려고 일부 작품을 떼어내 옮기는데 탄핵 반대자들이 일부러 떼는 줄 알고 시민들이 다가와 멱살을 잡은 사건을 잊지 못할 기억으로 떠올렸다. 오해로 봉변을 당했지만, 광장의 작품을 자신들이 지켜야 할 것으로 여긴 행동이란 생각에 마냥 뿌듯했다고 했다.

지난 4일 광화문 세종대왕 뒤편 야외전시장에서 촛불집회 사진전을 배경으로 펼쳐진 씻김굿 퍼포먼스 장면.
지난 4일 광화문 세종대왕 뒤편 야외전시장에서 촛불집회 사진전을 배경으로 펼쳐진 씻김굿 퍼포먼스 장면.
서예가 여태명씨가 시민들 앞에서 대형 붓으로 글씨를 쓰는 현장 서예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여씨는 광화문미술행동의 모든 전시 행사에 참여하는 열정을 보였다.
서예가 여태명씨가 시민들 앞에서 대형 붓으로 글씨를 쓰는 현장 서예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여씨는 광화문미술행동의 모든 전시 행사에 참여하는 열정을 보였다.

지난해 12월 광화문미술행동이 처음 시도했던 차벽프로젝트. 집회장을 둘러싼 경찰버스 차벽에 작가와 시민들이 그리거나 쓴 그림, 낙서 등의 천 이미지들을 붙이는 작업이었다. 김진하 기획자 제공
지난해 12월 광화문미술행동이 처음 시도했던 차벽프로젝트. 집회장을 둘러싼 경찰버스 차벽에 작가와 시민들이 그리거나 쓴 그림, 낙서 등의 천 이미지들을 붙이는 작업이었다. 김진하 기획자 제공
두 사람은 석달간의 미술행동 활동에서 미술 본연의 일상성을 회복할 가능성을 엿봤다는 걸 가장 큰 성과로 꼽았다. “작가가 일방적인 전시만으로 이야기하는 기존 미술판 속성에서 벗어났다는 것, 작업 결말을 예측하지 않고 대중과 수평적으로 자유롭게 소통하며 놀이판을 벌인 그 자체가 미술 본래의 건강성을 드러낸 모습이죠. 자본주의 시장논리에서 불가능한 미술 본연의 기능을 찾은 셈인데, 앞으로 현장미술인들이 이런 가능성을 어떻게 살려야 할지 고민해야겠죠.”(김진하)

2시간 넘게 농악과 함께 펼쳐진 ‘바람찬’ 퍼포먼스는 오후 4시 넘어 끝났다. 여태명씨가 작업한 큰 글씨 옆 작품 여백에는 축하주를 마셨다가 거나하게 취한 이도윤 시인이 즉석에서 쓴 탄핵 축하 시구를 걸걸한 필치로 써내려가 웃음을 자아냈다. 두 기획자는 작가들, 시민들과 어울려 작품 앞 포토존에서 파안대소하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진도아리랑’을 개사한 탄핵 축하송이 그들 위로 울려 퍼졌다. ‘아니 아니다, 근혜 아니다, 국민들이 모였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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