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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동 헌법재판소는 매국노 이완용이 살았던 집터였다

등록 2017-03-16 18:28수정 2017-03-17 14:05

탄핵 뒤끝 재동 헌재와 주변 답사해보니
세조, 계유정난때 김종서 등 참살
19세기 개혁가·역모자들의 거처로
북촌정취 남아 영화가 사랑하는 장소
헌법재판소 건물 북쪽 측면에 자리한 수백년 된 백송.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희귀목으로 두 갈래로 갈라져 있다. 재동 역사의 풍상을 지켜본 산증인이기도 하다.
헌법재판소 건물 북쪽 측면에 자리한 수백년 된 백송.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희귀목으로 두 갈래로 갈라져 있다. 재동 역사의 풍상을 지켜본 산증인이기도 하다.
지난 10일 서울 옛 동네 재동에 자리한 헌법재판소(헌재)는 대통령 탄핵을 확정한 역사의 현장이 됐다. 많은 이들에겐 앞으로 탄핵 발표와 청사 앞에 모여든 반대 세력들의 격렬한 시위 현장으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근대 공간사를 돌이켜보면, 사실 재동은 과거 조선시대, 구한말, 해방 정국 시기에도 나라의 명운을 갈랐던 격변의 무대였다. 탄핵 뒤끝인 14일 건축사학자 김란기 박사와 헌재터 백송, 인근 골목길 등을 돌며 재동 역사의 흔적들을 살펴보았다.

“무슨 공사냐구요? 탄핵 반대하는 분들이 망가뜨린 난간을 붙이는 중입니다. 잘 아실 텐데….”

재동 답사의 기점은 대개 지하철 3호선 안국역 2번 출구에서 시작된다. 이날 오전 헌재가 바라다보이는 역 2번 출구 진입시설 앞에서 인부들은 떨어져나간 철제 난간을 접착제로 붙이느라 땀을 흘렸다. “단단한 구조물인데, 파손 상태가 심각하다”고 했다. 출구 옆엔 접착제 통들과 주입기가 널려있고, 철제난간을 고정시킨 쇠막대 등도 보여 시위가 얼마나 격렬했는지를 체감할 수 있었다.

천천히 북촌로 옆 인도를 걸어 헌재 앞으로 걸어간다. 북촌로는 북악산 남쪽 계곡의 구불구불한 골짝 길을 해방 뒤 반듯하게 만든 찻길이다. 주변은 예부터 권문세가 양반들이 모여 살았던 북촌 핵심 동네였다. 헌재 자리는 원래 영조 때 풍양 조씨 세도의 기반을 만든 중신 조상경의 집터였다. 이후 100년 사이 이 집터의 조씨 터전에서 판서와 정승 수십명이 배출돼 ‘7대 판서터’란 말이 나올 정도였다. 앞서 15세기 재동은 유혈정변으로 역사에 등장한다. 세조가 계유정난 때 김종서, 황보인 등 단종을 받들던 중신들을 참살하고 흐른 피를 재로 덮어버렸다고 하여 우리말로 잿골, 한자라는 재동이란 지명이 생겼다.

헌재 정문을 통과해 5층 석조건물 북쪽 백송 공원 쪽으로 들어가려 했다. 평소 시민 휴식처로 개방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비원이 “시위 영향으로 당분간 출입을 금지시키라는 상부 지시를 받았다”며 가로막았다. 실랑이 끝에 김 박사가 백송 주변 사진만 찍겠다고 양해를 구해 겨우 들어갔다. 일행의 뒤로 “지난 석달간 시위 탓에 건물 사방을 밤새 지키느라 죽는줄 알았다”는 푸념이 들려왔다.

건물 북면을 끼고 돌면, 아직 피지 않은 철쭉 숲 바위기단 위로 하늘 향해 두 갈래로 사지를 뻗은 천연기념물 백송과 만나게 된다. 높이 14미터에 밑둥 껍질이 벗겨진 허연 줄기가 아래부터 두 갈래로 좍 갈라졌고, 받침대로 곳곳 줄기를 받쳐 신령한 희귀목임을 알 수 있다. 중국 원산이어서 300여년 전 중국 사신이 심은 것으로 보는 게 통설이다. 5월이면 아래 철쭉꽃이 활짝 피면서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한다는 게 헌재 쪽 직원들의 설명이다.

돔을 이고있는 바로 옆의 헌재 석조건물과 기묘하게 어울리는 백송은 재동 공간역사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역사학자 전우용 박사가 쓴 <서울은 깊다>(돌베개)를 보면, 헌재 터는 19세기 이래 숱한 혁신정객과 역모자들이 살며 활개를 쳤던 기운 드센 땅이었다. 헌종의 어머니로 풍양 조씨 가문 출신인 신정왕후는 친정이던 여기서 대원군과 모의해 안동 김씨 세도를 뒤엎었다. 1876년 개항 뒤엔 외교기관 외부가 터 바로 남쪽에 들어왔다. 터를 둘러보던 김 박사는 백송 아래 박규수 집터 표석을 가리켰다.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로 개화사상 선각자였던 그의 집터죠. 바로 뒤 담 넘어 한옥은 99칸 집으로 유명한 윤보선 전 대통령 저택의 뒤켠입니다.”

박규수의 사후 터는 거센 풍상을 겪는다. 근대 우편제도를 도입한 개화파 관료 홍영식이 집을 지어 살았는데, 김옥균과 주도한 갑신정변이 실패해 살해당한 뒤로 줄줄이 역모자들의 거처가 되는 운명을 맞는다. 이어 집주인이 된 경무사(경찰청장) 안경수도 역모죄로 처형됐고, 그 뒤 입주한 중신 이호준은 먼조카였다가 양아들로 들어온 매국노 이완용과 1900년까지 여기서 살았다.

헌재 터에는 역모의 역사 한편으로 의료와 교육의 역사도 함께 깃들어있다. 1885년 미국 선교사 알렌이 고종의 윤허를 얻어 설립한 최초의 서양식 근대 병원인 광혜원(제중원으로 개칭)이 홍영식의 집터 일부를 비집고 세워졌다. 갑신정변 때 크게 다친 수구파 정객 민영익을 치료해 목숨을 구해준 대가였다. 광혜원은 불과 2년만에 구리개(을지로)로 옮겨갔지만, 대한제국 정부는 1900년 이완용의 부친 이호준이 살던 재동 집을 사들여 국립병원격인 광제원을 다시 세워 운영했다.

일제강점기엔 터에 경기고등여학교(경기고녀:경기여고의 전신)가 들어왔고, 45년 해방 직전 정동으로 이전한 뒤엔 창덕여고의 교지가 되어 80년대말까지 여성교육 요람이 됐다. 부근의 재동초교와 교동초교도 1894~95년 국내 첫 근대 초등교육기관으로 세워진 유서깊은 학교다. 이곳을 휩쓴 정변의 여파로 숱한 인물들이 죽어나갔지만, 의술과 교육으로 민중의 목숨을 구하고 교육입국의 토대를 닦는 노력들도 헌재 터 공간에서 벌어진 셈이다. 해방 뒤 경기고녀 강당에선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의 조선인민공화국 선포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1945년까지 헌재터에 자리했던 옛 경기고등여학교(경기고녀:경기여고의 전신)의 일제강점기 교사 모습. 경기고녀가 정동으로 이전한 45년 이후부터 80년대말까지는 창덕여고의 교사로 쓰였다.
1945년까지 헌재터에 자리했던 옛 경기고등여학교(경기고녀:경기여고의 전신)의 일제강점기 교사 모습. 경기고녀가 정동으로 이전한 45년 이후부터 80년대말까지는 창덕여고의 교사로 쓰였다.
백송을 돌아보고 나서 기단부, 중단부, 상단부의 삼단 얼개로 구분되는 헌재 건물을 둘러보았다. 전우용 박사는 6월 항쟁 이후 87년 체제의 산물로 88년 신설된 헌재가 재동에 들어선 것은, “70~80년대 북촌의 교육기관들이 대거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힘센 국가기관들이 청와대, 정부청사 등과 가까운 그 자리에 대신 눌러앉게 된 당대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고 짚었다. 1989년 창덕여고가 방이동으로 이전한 뒤 헌재 입주가 확정됐고, 93년 김희수 건축사무소의 설계로 지상 5층, 지하 1층의 석조건물이 건립되면서 헌재의 재동 시대는 시작됐다. 역모와 정변이 일어났던 자리에 들어선 헌재는 지난 20여년간 간통죄 위헌, 통진당 해산, 대통령 탄핵 등 나라를 뒤흔드는 결정을 숱하게 내리며 터에 새 시대의 역사성을 부여해왔다. 다만, 헌재 건물 자체는 건축계에서 그닥 호평을 받지는 못했다고 한다. 권위적인 면모는 있으나 북촌의 고고한 경관에 걸맞는 건축어법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비판이 일었고, 일부 건축인들은 이전이나 리모델링을 거론하기도 했다는게 김 박사의 전언이다.

재동 헌재에서 화동고갯길과 윤보선길로 통하는 길목인 북촌로 5가 골목길. 들머리의 향나무와 더불어 주위에 한옥들이 다수 남아있어 북촌의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길이다.
재동 헌재에서 화동고갯길과 윤보선길로 통하는 길목인 북촌로 5가 골목길. 들머리의 향나무와 더불어 주위에 한옥들이 다수 남아있어 북촌의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길이다.
헌재를 나와 담을 끼고 북쪽인 북촌로 5길 골목으로 들어섰다. 재즈음악이 흘러나오는 카페와 한옥 공방들 사이난 길로 개량한복 입은 소녀들의 행렬이 삼삼오오 지나간다. 윤보선 길과 화동고개로 이어지는 이 샛통로는 양쪽에 한옥들이 많이 남아 북촌의 옛 정취를 간직한 몇 안 되는 골목길로 꼽힌다.

길을 빠져나오면 동쪽으로 홍상수 감독이 2011년 만든 영화 <북촌방향>의 배경이 된 재동 네거리가 보인다. 그 네거리 북쪽으로 직진하다 오른쪽 샛길로 들어가 다시 골목길 깊숙한 곳으로 꺾어 들어가면 나타나는 명소가 지난달 문을 닫은 술집 ‘소설’이다. 역시 <북촌방향> 배경으로 등장하는 문화예술인들의 단골 ‘아지트’였다.

개혁가, 역모자들의 집터부터 헌재의 역사를 거쳐 영화 <북촌방향>, 술집 ‘소설’에 이르기까지 재동에 담긴 시간의 켜가 얼마나 깊고 다채로운지 실감나는 답사길이었다. 김란기 박사는 “탄핵 판결로 헌재 공간의 역사성이 새롭게 부각되는 계기를 맞았다”며 “헌재를 비롯한 재동의 건축물과 공간들도 역사적 의미가 겹겹이 축적된 공간 성격에 맞게 경관을 재구축하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고 소감을 털어놓았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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