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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그림 속에 너를 꽁꽁 숨겨놓았다

등록 2017-03-25 10:36수정 2017-03-25 10:42

[토요판] 김미경의 그림나무
(6) 그림 그리는 이유
‘나도 그림 잘 그리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곤 한다. “좋아하는 거, 좋아하는 아주 사소한 것들부터 그려보세요!” 좋아하는 사람, 좋아하는 풍경, 좋아하는 세상을 곳곳에 꽁꽁 숨겨 그렸다. 서촌, 그리움(서촌옥상도15), 2016년, 펜, 110×28㎝ (※이미지를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선배 왜 그림을 그려요?”

얼마 전 만난 한 후배가 불쑥 물었다. “선배 왜 살아요?” 하는 질문을 받은 것처럼, 갑자기 머릿속이 하해졌다. 쉽게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몇 년 전, 딸이 다니던 대학에 놀러가 일주일 정도 머문 적이 있었다. 딸이 수업을 듣고, 친구들을 만나는 동안, 나는 딸이 주로 찾는 도서관 앞에 앉아, 도서관 앞 크게 자란 나무들과 건물을 정성껏 그렸다. 그 그림을 볼 때마다 사람들은 묻는다. “아이구~ 어떻게 그 복잡한 나무와 도서관의 벽돌을 하나하나 다 그렸어요?” “지루하지도 않아요?”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혼자 대답한다. ‘딸이 좋아서요!’

동네 풍경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친한 선배의 기와집이 길 건너 살짝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렸다. 그 구도가 좋아서이기도 했지만, 내 맘속에서 ‘본격적인 화가로 입문하는 첫 그림 격’인 그 그림에 선배의 집을 숨겨 그려 넣고 싶었다. 그 선배 집의 기와 지붕은 풍광 속에서 아주 작게 그려졌지만, 뭔가 내 사랑을 몰래 심어둔 기분이었다. 동네 한 모자집 간판에 ‘나는 아직도 너를 내 시 속에 숨겨놓았다’(I still hide you in my poetry)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지나갈 때마다 ‘나는 아직도 너를 내 그림 속에 숨겨놓았다’로, ‘시’를 ‘그림’으로 바꿔 소리 내어 읽어본다. 나는 짝사랑하는 사람과 처음 만났던 장소, 함께 술 마시던 장소를 그림 한 귀퉁이에 꽁꽁 숨겨놓기도 한다. 영화 <화양연화> 속에서 앙코르와트를 찾은 차우(량차오웨이)가 벽에 뚫린 구멍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이듯 말이다. 좋아하는 마음을, 열정을, 그림 어딘가에 꽁꽁 숨겨 놓는 재미가 솔찬하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나는 내가 뭘 좋아하는 사람인지
뒤늦게 깨달아가기 시작하는 것 같다

처음 그림 그리기 시작할 때부터의 기억들을 더듬다가 무릎을 탁 쳤다. 그렇구나!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과의 기억이, 추억이, 나를 그림 그리게 하는구나! 좋아하는 사물들이,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를 그림 그리게 하고, 그리다 보면 점점 더 좋아지게 되기도 하는구나! .

오랫동안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잘 알 수 없었다. 아주 어릴 땐 “너는 무슨 색깔을 좋아하니?”, “너는 어떤 꽃이 좋아?” 하는 질문에도 크게 당황스러웠다. 초록색도 좋고, 보라색도 좋고, 주황색도 좋고, 개나리도 좋고, 민들레도 좋고, 봉숭아도 좋은데… 도대체 어떻게 하나를 꼭 집어 선택할 수 있단 말이지? 나는 도대체 무슨 꽃을 좋아하는 사람이지? ‘어떤 꽃, 어떤 색깔을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 성격의 사람’이라는 식의 글을 읽으면 더 얼굴이 빨개졌다. 나는 도대체 누구지? 좀 더 자라면서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사회 속에서 규정되고 억압된 것이라는 사실이 싫고 화가 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듯싶었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퇴색되고 변한다는 것도 무서웠다. 직장생활 하고, 애 낳아 기르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면서는,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하는 일조차 잊어버렸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나는 내가 뭘 좋아하는 사람인지, 뒤늦게 하나씩 깨달아가기 시작하는 것 같다. 내가 어떤 그림을 그리게 될지 전혀 상상하거나 예측하지 못한 채, 그냥 닥치는 대로 그리고 싶은 것들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내가 그려놓은 그림을 들여다보다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했다. 그냥 눈에 보이는 것을 그려내는 것 같지만, 사방팔방 펼쳐진 세상에서 어떤 부분을 떼어내 그릴지는 어마어마한 선택이다. 물론 한두 시간 후딱 하고 마는 스케치 때는 다르다. 이것저것 눈에 보이는 것을 마구 그릴 수 있다. 하지만 거의 100시간 이상을 작심하고 그려야 하는 그림의 경우, 좋아하지 않는 것을 선택해 그리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무엇인가를 애써 그린다는 것은, 그 대상을 눈물나게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란 걸, 그리면서 깨닫는다.

좋아하니까 그리고, 그리면서 더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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