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이 올해 열겠다고 발표했던 주력 전시회들을 공식해명 없이 잇따라 취소 또는 연기하면서 입길에 올랐다.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1989년 이후 한국현대미술과 사진’전 전시장.
현대미술의 메카로 불리는 미국 뉴욕 모마(MoMA)현대미술관은 2월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맞서 사상 초유의 ‘전시 항거’ 퍼포먼스를 벌였다. 트럼프가 이슬람권 7개 나라 국적자의 입국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내린 것이 도화선이었다. 모마 소장 큐레이터 3명은 그 직후 보란 듯이 5층 상설전시장의 서구 명화들을 이슬람권 국가 출신 작가들의 작품으로 바꿔버렸다. 피카소와 마티스, 루소 등의 20세기 초 명화들을 뗀 자리엔, 동대문 디디피(DDP)를 설계한 이라크 출신 건축 거장 자하 하디드의 그림을 비롯해 이란과 수단 작가의 그림, 토템 조각, 사진 등이 들어섰다. 보수적인 모마가 트럼프의 반이민 행정명령에 이렇게 신속하게 항의를 표시한 건 이례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서구 명작의 전당이 이슬람권 미술가가 범접할 수 없는 공간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자는 게 큐레이터들의 의도였다고 외신은 전한다.
한달여 지난 요즘 한국 국립현대미술관의 행보는 모마의 퍼포먼스와 하늘과 땅만큼 간격이 커 보인다. 바르토메우 마리 관장이 지난 연말 취임 1주년을 맞아 ‘마리 프로젝트’라고 발표한 2017~18년 주요 전시안이 구설 속에 속속 엎어졌다. 올해 역점을 둔 팝아트 대가 앤디 워홀과 입체파 거장 피카소의 전시는 지난달 모두 백지화됐다. 워홀 전시는 ‘앤디 워홀: 그림자들’이란 제목 아래 1970년대 실크스크린 연작 ‘그림자들’ 102점과 초기 실험 작업들을 선보이는 미국 디아센터 순회전으로 2~7월 치를 계획이었다. 그런데 개최 코앞에서 일정이 조정되지 않아 개막날도 못 잡은 채 무기 연기됐다가 결국 취소됐다.
내년 예정했던 피카소전도 최근 슬그머니 접었다. 미술관 쪽은 구체적인 경위를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시기획 비용이 애초 예산액보다 6~7배에 달한다는 것을 전시안이 발표된 뒤 확인하면서 뒤늦게 취소하는 데 급급했다는 후문이 흘러나온다. 이달 초부터 7월까지 열기로 했던 ‘이집트 초현실주의자들’전도 해프닝이 벌어졌다. 6일 언론간담회를 열 예정이었으나, 출품작인 이집트 국보급 작품의 반출이 까다롭다는 이유로 갑자기 간담회와 개막 시점을 이달 말로 미뤄 기자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공공미술관은 물론이고 화랑들도 한해 전시계획은 1년 전 일정을 잡고 준비하는 것이 원칙이고 상식이다. 나라의 대표 미술관에서 공식 발표한 핵심 전시들을 세 건이나 ‘펑크’낸 것은 전례를 찾기 어렵다. 미술계 쪽은 국격 실추라고 할 비상사태인데도 공식해명조차 없이 감추듯 전시가 취소됐다는 것에 어이없어하는 분위기다.
미술관 안팎에서는 조직 내부를 장악하지 못한 채 업무도 갈피를 못 잡고 있는 마리 관장의 미흡한 소통 역량과 조직개편 뒤에도 혼선이 지속되는 내부 상황 등을 요인으로 꼽고 있다. 미술관 사정에 밝은 한 기획자는 “취소된 전시들은 지난해 관장이 추진할 당시 내부 학예직들 사이에서 콘셉트도 진부하고 일정 예산 등에서 충분한 협의가 진행되지 않았다며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며 “이런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는 게 중론”이라고 전했다. 과거에는 학예직들이 분과·전체 회의 토론을 거쳐 앞으로의 전시안에 대한 의견을 모아 관장이 검토해 확정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마리 관장 취임 뒤로는 학예직 의견수렴 과정이 형식화하고 일부 학예관과 관장들이 전시안 선정 논의를 주도하는 일방적인 소통 구조가 고착화되면서 이런 사달이 빚어졌다는 얘기다. 계약직인 서울관 학예직과 정규직 학예직의 갈등, 관료화한 정규 학예직 간부들의 독단적인 업무 추진도 전시기획을 부실화하는 데 한몫을 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바르토메우 마리 관장. 취임 1년을 넘겼으나 전시기획 등의 업무가 계속 파행을 빚고 있고 소통도 여전히 미숙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미술관 쪽은 지난 2월 과천관 학예실과 서울관 운영부를 통합하는 조직개편 이후 과천관 학예직 간부들과 기획운영진이 대거 서울관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덩치가 큰 과천관은 장기 운영 청사진이 제시되지 않은 채, 전시전담 학예관도 없이 경력이 짧은 학예직과 수장고 인력 위주로 운영돼 슬럼화 우려가 제기되는 실정이다. 한 중견평론가는 “취임 1년 지나도록 전시의 비전조차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마리 관장과 무사안일로 일관하는 학예직 간부들, 이들과 사실상 공생하는 문화체육관광부 파견 관료들의 유착관계와 타성을 끊는 것이 정말 시급한 개혁과제”라고 일갈했다. 이와 관련해 지난달 말부터 서울관에서 진행 중인 통합학예실장 공모와 서울관 학예직들의 충원 결과가 내부개혁의 성패를 보여줄 시금석이 되지 않겠느냐는 관측도 미술계에서 나온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한겨레>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