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토메우 마리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올해 핵심사업으로 내놓은 기획전들이 줄줄이 취소되거나 연기되는 등 파행을 빚으면서 업무 추진력과 소통 역량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무사안일, 직무태만의 극치다. 나라의 대표 미술관이 올해 국민 앞에 내보이겠다고 약속한 핵심 전시들이 줄줄이 무산되고 연기됐다. 그런데도 파행을 인정하고 해명을 구하고 사죄하지 않는다. 전시 파행 자체도 쉬쉬하다 언론 취재로 드러났다. 국가기관의 근무기강을 뒤흔든 사건으로, 외국 미술관 같으면 당장 관장 경질사유인데도 책임을 떠안고 나선 이도 없다. 국민 세금으로 운영하는 미술관에서 이런 무심한 배짱이 놀랍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주력 전시인 앤디 워홀 전과 피카소 전, 이집트 초현실주의 미술전이 사전협의 미흡과 예산 미비 등의 사유로 취소, 연기되었다고 <한겨레>가 보도한(
국립현대미술관, 슬그머니 사라진 전시) 뒤인 10일, 기자는 감독 부처인 신은향 문화체육관광부 시각예술디자인과장과 통화했다. 신 과장은 왜 해명과 사과를 내놓지 못하느냐고 묻자 “(취소된 전시의) 대안을 찾는 중이라 그런 것 같다”면서 말했다. “관장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기관이라 예산 사용이 탄력적이지 못하고 조직개편도 연초 이뤄지는 등 제도적 한계에서 비롯된 거다. 지금 시점에서 (관장 거취를) 평가하기는 이르다.”
실소가 나왔다. 전시들이 펑크난 건 미술관의 기본 중 기본인 기획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아 일어난 일이다. 일년 전시계획은 사전에 기획, 교육을 맡은 학예직과 예산, 진행 등의 실무를 맡은 행정직 사이에서 오랫동안 토론해 의견을 모은 뒤 관장이 최종적으로 조율해 발표한다. 예산상의 문제나 조직여건의 한계까지 사전 파악해 완결된 형식으로 내놓아야 하는 것이다. 미술관 내부 관계자들은, 학예직들 사이에 숱한 우려 의견들이 나왔지만, 관장과 소수 학예직 간부들이 일방적으로 추진하다가 뒷감당을 하지 못한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관련 법규를 잘 모르는 관장이 무리하게 전시를 추진했고, 보완책을 조언해야 할 강승완 학예실장 등의 보좌진들은 의사결정을 미루거나 소통 부실로 짚어야 할 예산 조달, 외부기관 협의 일정 등의 사안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는 바람에 이런 불상사가 생겼다는 지적들이다. 미술관 쪽의 이후 행보는 가관이다. 10일 <한겨레>가 후속취재에 들어가자 미술관 쪽은 뒤늦게 홍보관이 전화를 걸어와 해명 이메일을 돌리겠다고 밝혔다.
무엇보다 전시 파행에 대해 책임을 지고 사과해야 할 이는 바르토메우 마리 관장이다. 외국인 관장 1호라고 문체부가 치켜세우며 유럽에서 데려온 이 프로기획자는 올해 전시기획 과정에서 법규와 소통에 둔감한 채 일방적인 전시기획과 조직개편안을 발표하는 데 급급했다. 문체부 관계자들에 따르면, 그는 전시가 줄줄이 무산되자 경직된 법규 등 제도에 대한 보완이 안 돼 벌어진 일이라는 의견을 냈다고 한다. 관장을 보좌하는 강승완 학예실장을 비롯한 정규 학예직 간부들도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은 전시 추진 과정에서 예상되는 비용, 세부 협의 등의 여러 문제들을 제대로 예상하지 못했고, 일선 학예직들의 지적과 비판을 제대로 관장에게 전달하지 못했다. 김종덕 전 장관이 낙점한 마리 관장의 취임을 위해 발벗고 정지작업을 벌인 문체부의 우상일 전 예술정책국장, 실무자로서 미술관 지도 감독 업무를 맡은 신은향 시각예술디자인과장 또한 이런 파행에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2000년대 들어 흑역사가 거듭되고 있다. 김윤수, 배순훈, 정형민 관장 등이 업무역량 부족이나 채용비리 등으로 모두 쫓겨나다시피 공직에서 물러났다. 마리 관장의 역량 부족을 들어 다시금 중도퇴진론이 돌고 있는 현실이 참담하다. 십여년째 되풀이되는 이런 파행의 드라마는 정권의 장식재 정도로만 치부됐던 국가 미술문화 정책의 실상을 드러내는 것들이기도 하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