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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비운의 역사학자 하담을 돌아보다

등록 2017-05-01 18:07수정 2017-05-01 20:16

한창균 연대 교수 10년간 연구성과 모아 <하담 도유호> 출간

유학 거쳐 해방 뒤 월북한 인물
한반도 구석기~철기 입증·체계화
일제 ‘금석병용기론’ 반박
남한 학계에도 막대한 영향력
하담 도유호(1905~1982) 박사. 오스트리아 빈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해방 뒤 일본 식민사학의 그늘을 걷고 한반도 고고학사를 처음 체계화하는 기념비적인 업적을 이뤄냈다.
하담 도유호(1905~1982) 박사. 오스트리아 빈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해방 뒤 일본 식민사학의 그늘을 걷고 한반도 고고학사를 처음 체계화하는 기념비적인 업적을 이뤄냈다.
분단 이후 남녘 학계에서 월북 인사들은 잊혔다. 그러나 단 한명, 예외가 있다. 1935년 오스트리아 빈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고고학자 하담 도유호(1905~1982)다. 46년 월북한 뒤 김일성대 교수와 고고학·민속학 연구소장을 지낸 그는 60년 국내 첫 고고학개론서인 <조선원시고고학>을 통해 한반도의 선사, 고대사를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 시대로 구분한 편년체계를 처음 세웠다. 이 저서의 편년체계는 지금도 남북한 학계에서 연구의 기본틀이다. 한반도에 구석기, 청동기 시대가 없었고 석기와 금속기를 같이 쓰는 시대만 있었다는 일제의 악명 높은 금석병용기 학설을 처음 뒤엎고, 구석기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밝혀낸 이도 하담이다. 이청규 영남대 교수는 “90년대까지 남한 학계는 학문적으로 그를 극복하지 못했을 정도로, 분단을 넘어 그가 학계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말한다.

1세대 고고학자로 한반도 고고발굴의 아버지였지만, 정치사상 투쟁의 회오리에 휘말려 60년대 말 숙청당한 하담의 평전이 처음 나왔다. 한창균 연세대 교수가 최근 펴낸 <하담 도유호>(혜안)는 그의 삶과 학문을 상세히 살피고 분석한 역저다.

하담은 함흥의 유복한 집안 출신이다. 일제강점기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유학해 조선사 전공으로 처음 현지 학위를 받았다. 월북한 뒤 4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중반까지 북한 고고학을 이끌며 남한 학계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지은이는 그가 프랑크푸르트대학 재학 중 스승인 사회사학의 거장 만하임을 독일 나치 정권이 축출하면서 그도 투옥과 추방을 겪고 빈대학으로 학적을 옮겼던 정황을 언급한다. 문화권 전파와 이동을 중시하는 빈 학파의 영향 아래 35년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세계 문화사의 넓은 시야에서 한반도 역사를 파악하려 했고, 이런 지론은 월북 뒤 연구에도 그대로 반영됐다고 책은 적는다.

40년 2차대전 발발로 귀국한 그는 일제 감시 속에 자리를 못 잡다 해방을 맞는다. 46년 3월 서울에 간 그는 민주주의민족전선, 인민당, 조선공산당에 적을 두고 6달간 정치적 활동을 벌였다. 투철한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이런 정치 이력은 월북 뒤 김일성대 교원 임용에 요긴한 근거가 됐다고 책은 서술한다. 47년 10월 역사문학부 ‘고고학 강좌장’으로 임명된 하담은 49년 고구려 벽화무덤인 안악 3호분을 필두로 한반도 구석기~철기시대를 입증하는 기념비적 발굴을 주도한다.

도서출판 혜안에서 나온 <하담 도유호> 표지.
도서출판 혜안에서 나온 <하담 도유호> 표지.
그는 56년 궁산 유적 발굴보고서를 내면서, 해방 이후 처음으로 신석기 편년체계를 확립했다. 57년 발굴된 지탑리 유적의 조사 및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는 당시까지 불투명했던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의 상호관계도 밝혀냈다. 63년 타제석기 등 굴포리 구석기 유적을 국내 최초로 확인하면서 56년부터 7년 남짓한 기간 동안, 구석기~철기 시대에 이르는 한반도 고고학 편년의 기본 얼개를 모두 세워놓았다. 그러나 60년대 중반 김일성 유일사상 체계가 확립되는 격변 속에서 ‘수정주의 반동 학설’의 주동자로 몰려 축출된다. 책은 전파론으로 한반도 원시문화의 전개 과정을 해명하려던 하담의 연구가 외적 문화요인을 과대평가한 한계를 갖는다고 비판하면서도 불모지 같은 여건에서 한반도 고고학 체계를 닦은 업적을 다시금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고고학적 문화 개념을 창안했고, 자연과학과의 협력연구, 고고학 용어 순화 등에도 기여한 거장을 지은이는 “진정 최고봉에 어울리는 역할을 다하였다”고 평하며 글을 맺는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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